본문 바로가기
이 책.

남아 있는 나날

by 글쓰는 백곰 2017. 12. 20.

영국의 달링톤 홀에서 평생 집사로 살아온 스티븐스.

한때 달링톤 홀은 각국의 저명인사들이 오고가는 유명한 저택이었다.

그러나 달링톤의 사망으로 저택이 넘어가게 되면서 

집사였던 스티븐스 역시 새로운 주인을 맞이 하게 된다.

새 주인은 미국인으로, 저택의 운영은 이전보다 훨씬 간소하게 유지되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날, 주인은 스티븐스에게 일주일의 휴가를 제안한다

처음으로 집을 떠날 기회를 잡게 된 스티븐스는

과거 자신과 같이 일했었던 캔턴 양을 만나기로 마음 먹는다.

캔턴 양은 아주 가끔씩 그에게 편지를 쓰곤 했는데,

최근 편지에서 그녀가 무척 공허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기회에 일손이 모자란 이 저택으로 오는게 어떻겠는가를 제의할 겸

스티븐스는 길을 나서게 된다.

주인의 차를 몰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여정,

과거의 일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30년이 넘도록 충직하게 섬겼던 달링턴 경은 영국 신사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한때 나치에게 이용당하기도 하며

저택의 유태인 하인들을 해고하는 등 이해할수 일들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충직하기만한 스티븐스는 주인의 결정에 이렇다할 견해를 보이지 않았다. 

이미 결정되어진 지시사항을 총무인 캔턴 양에게 통보하듯 알려 줄 뿐이었다

캔턴 양은 스티븐스와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달링턴 홀을 관리하던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또한 스티븐스의 삶의 굴곡마다 함께 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임종을 지킨 사람이었으며,

불합리한 주인의 처사에 화를 내며 따지기도 하는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훌륭한 집사로서의 직무에만 매달린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임종도 그냥 넘겨버렸으며 

그녀가 보내는 애정의 표현 역시 묵살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며 저택을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신뢰하던, 영국의 최고의 신사를 모신다는 명예로 살아온 그였지만

주인이 나치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결코 명예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것에 대해 쓴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집사의 역할만 꾸준히 이행할 뿐이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

그렇게 33년을 섬긴 주인이 죽었을 때,

그는 자신의 최고의 시절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더이상의 열정도 기력도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지나가버린 사랑 캔턴양을 떠올리고선 그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녀와 재회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그의 예상처럼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과거 저택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과거의 그 감정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었으므로

스티븐스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인생의 황혼 같은 저녁 노을을 보면서 공허해 하는 스티븐스.

그때 그의 뒤에 서있던 낯선 사람이 말동무가 되어준다.

공허하게 지난 날을 회고하는 스티븐스에게 다정히.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벋고 즐길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영국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엿볼수 있는 작품이다.

일본인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비록 5살에 영국으로 이민 왔지만)

집사의 입장이 되어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 자체가 아주 놀랍다.

무척 자연스럽고도, 디테일한 상황 설명 때문에

그의 이름과 이야기의 내용이 잘 매치가 되지 않을 정도다.


주인공은 참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일에만 몰두하는 성격이다.

물론 자신의 일을 완벽히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명예, 긍지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가 아주 훌륭한 인물을 섬긴 것도 아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집사라는 이미지는

주인의 모든 것들을 뒷받침해주는 섬세함 속에서도

어느정도는 객관적인 충고도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스티븐스는 그렇지 않다.

별로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주인의 행동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라고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 집사의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은 부분이 아닐까.

단지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해나간다는 목적으로

타인의 감정들을 고려하지 않았던 그런 사무적인 모습의 스티븐스에게

캔턴 양이 여러번 관심과 애정을 주었지만

그는 그 기회마저도 무심히 흘려 보냈다.

그렇게 좋은 세월과 시간을 다 보내고 

더 이상의 열정이 남지 않은 늙은 육체만이 남았을 때서야

지난 시간들을 반추해보는 어리석음.

그리고 이제서야 돌아보게 되는 그 애틋한 감정들.

그러나 다시 되찾을수 없는 지난 시간의 타이밍.

캔턴 양이 공허해 보였던 것은

그를 그리워했다기 보다는 

그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그리워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너무나 늦게 깨달아버린 것들 속에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스티븐스는 인생의 허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를 위로하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의 몇마디의 말이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니 이제는 지금의 시간, 남아 있는 나날을 즐기자는 충고.

어쩌면 스티븐스는 이제야 제대로 된 나날을 보낼수 있게 될지 모른다.

제대로 된 사랑과, 제대로 된 행복을 찾는 그런 나날을.


'이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식주의자 - 한강  (2) 2018.01.18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 아모스 오즈  (0) 2017.12.30
작은 것들의 신 - 아룬다티 로이  (0) 2017.11.29
마음 - 나쓰메 소세키  (0) 2017.09.29
목로주점 - 에밀졸라  (0) 2017.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