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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그사람9

3학년 10반 36번에게 고등학교 3학년에 반장을 했었다.학기 초에 어쩌다가 임시반장을 하게 되었는데그게 계기가 되어 반장으로 굳어버린 케이스였다.게다가 고3 반장을 기피하는 것은 인문계나 실업계나 다 마찬가지였을거라고 생각한다.어쨌거나 그 1년은 내 인생에 많은 것들을 남긴 귀중한 시간이었음은 분명하다.단체생활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상황 속에서인생의 다양한 면을 맛본 듯한 느낌이었다.비록 50명 남짓한 작은 규모였지만그들을 대표하는 것 역시 좋았다.그들은 나를 좋아했는지 어쨌는지 잘 모르겠지만나는 매일매일 아이들의 이름과 번호를 외우고,그들이 어디에 취업했는지를 애정을 담아 기억하곤 했었다. 실업계 고등학교는3학년부터 취업 실습을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그렇게 날이 갈수록 교실에 빈자리가 생겨났고그 아이들의 출석부 번호 옆엔 회.. 2020. 6. 29.
그 시절의 소녀들에게 며칠 간 몸이 아팠다.그래서 되도록 의식적으로 몸을 쓰지 않으려고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어제는 한국단편 소설을 읽었는데,낯익은 듯한 상황과 인물들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주인공은 고아로 수녀님이 돌보는 보육원에서 자랐다.이제 그녀는 스스로의 밥벌이를 하는 성인이 되었지만유년기의 상실은 두고두고 그녀의 일상을 맴돈다.그래, 나에게도 그녀와 같은 소녀들이 있었다.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는 있지만만나본 적은 없는, 그런 사이였다. 20대 중반에 시작한 방통대 공부는나에게 여러가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는데,그 중 특히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배움이란 단순히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실천하는 순간 완성된다는 것이었다.단순히 어떤 것이 좋다에서 그치지 않고그것을 실행할 내 능력이 조.. 2020. 6. 19.
Million Dollar Bill, Whitney… 오래간만에 한가로운 오전을 보내며소파에 누워 휘트니의 노래를 듣는다.그녀의 마지막 노래라고 할수 있는‘Million Dollar Bill’을 듣고 있으니여러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솟구친다. 팝을 즐겨 듣지는 않지만유일하게 챙겨듣는 팝가수가 있다면단연 휘트니일 것이다. 그녀의 전성기 시절 목소리를 좋아한다.그 속에는 사람의 영혼을 흔드는 어떤 강인함이 있다.자신만만한 고음, 안정된 페이스의 선율은듣는 사람마저 용기를 얻게 하는 어떤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했다.그래서 그녀를 사랑했다.그 당당함을. 나의 학창시절.그녀는 영화 ‘보디가드' 속의 슈퍼스타, 그 자체였다. 언제나 너를 사랑하겠노라고 노래하는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꽤나 오랫동안 온 거리에 흘러 넘쳤다.얼마나 유명했고, 근사했는지나는 그 노래가 원래 .. 2019. 2. 9.
박씨 아저씨 나는 한때 화물운송업체에서 일했었다.엄밀히 말하면 ‘알선업체'이다.각자 영업용 화물차를 가지고 있는 차주들에서달마다 수수료를 받으면서 업체로부터 운송 알선을 해주는 곳이었는데,엄마가 배차를 하고,나는 경리를 보았다.그것이 내 첫 직업이었다. 그때가 1997년이었고,IMF로 경제가 파탄나던 시기였다.원래 화물업은, 화물운전만 전문으로 하는 기사들이 있었다.그러나 IMF 이후로 퇴직한 사람들이 몰리면서전직 은행원, 꽃농장 주인등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7년을 거기에서 일하면서여러사람이 떠오르곤 하는데 그중 박씨 아저씨가 기억난다. 아저씨는 할아버지라도 해도 이상하지않을만큼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다혈질에, 화가 나면 목소리부터 커지는 사람이었고그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자주 부딪히긴 했지만그 과정을 한번 겪.. 2018. 9. 1.
Mrs. V 아이는 작년 9월, 킨더에 입학했다.8월에 개학이었지만,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입학관련서류를 준비하는데만 해도 한달이 걸렸다.학교에서의 첫 날, 우리는 담임선생님인 Mrs. V를 만났다. 원래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Mrs. Lee였는데출산으로 인해 장기 휴가를 내게 되었고,그 자리에 Mrs. V가 오게 된 것이었다.아이를 처음 학교에 보내는 나로써는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내 자식이지만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고,고집도 쎈 편이어서 과연 적응을 잘할까 싶었다.아니나 다를까,아이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다.물론 이전에도 한국에서 어린이집을 몇 개월 다닌 적은 있었다.그러나 킨더는 다른 차원이었다.어린이집에서는 세세한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이었다면,킨더에서는 사회생활 훈련소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18. 3. 1.
첫번째 아들 나는 약 8년 전부터 해외아동을 후원하고 있다.예전에도 후원에 관심은 많았지만,한번 시작하게 되면 계속 그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나의 생활에 확신을 할수가 없었기에 망설이기만 하다가 말이다.물론,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엄마가 말기 암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그 덕분에 난생처음 종교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고신에게 엄마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면서,한편으로는 내가 신을 기쁘게 하면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까그런 마음이 가장 컸었다. 게다가 그 시기에 아이티 지진까지 일어나 후원에 대한 광고가 넘쳐나기도 했었다.가장 믿을만한 기관이 어디 있을까 고민하다가 컴패션을 선택했다. 첫번째 아이는 7살이 된 인도네시아 소녀 였고두번째 아이는 10살이 된 인도네시아 소년이었다.그 소년이 바로 Vico 다... 2017. 7. 10.
점쟁이 문득 예전 일들이 떠오른다. 21살, 나와 동갑인 사촌과 함께 점을 보러 갔었다. 사촌은 지금 사귀는 사람과의 결혼, 그리고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대답을 듣고 싶어했었다. 난 사실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결혼도 관심 없었고, 좋은 직업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사촌의 동행으로 호기심이 들어 쫓아가본 것이었다. 1998년. 복채가 2만원이었다. 점쟁이는 생년월일을 듣더니 사촌에게 제법 그럴싸한 말들을 쏟아냈다. 손을 쓰는 일을 해라, 지금 남자는 나쁘지 않다 등등. 그래서 살짝 기대가 되었다. 나의 미래는? 내 순서가 되자, 갑자기 점쟁이는 정색하며 말했다. 궁금할 게 뭐냐. 네가. 너 지금 되는게 하나도 없지?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노력해도 잘 안되지? 그런데 네 인생이 그래. .. 2015. 5. 4.
문학선생님 사춘기 때만 해도 문학을 참 좋아했다. 특히 시를. 그래서 국어와 문학 점수는 좋았었다. 게다가 교내 백일장의 운문 부분은 거의 장원이었기 때문에 국어 선생님과 문학 선생님은 어쩔수 없이 친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 중 특이한 카리스마로 나를 제압한 분이 있으셨는데 그분이 문학선생님이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까다로운 사람들을 몇몇 만났는데 그중에서 최고봉이라고 할만한 분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첫 문학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아이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대충 듣고 보니 그분의 평판이 아주 좋지 않았다. 다들 몸을 사렸다. ㅋ 난 사실 과목 자체가 좋았으므로 신경쓰지 않았지만, 첫 수업을 듣고 나서 느낄수 있었다. 역시나, 대단하시다는 것을. 그분은 자신의 수업시간에 시계를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2015. 4. 29.
슈퍼마켓 아저씨 19살. 1996년. 실업고를 다녔지만, 학교에서 추천하는 8개의 회사에서 줄줄이 떨어지고 그때 마침 숙부가 더이상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부모님은 나를 떠밀었다. 사람 구하기도 힘들었을테고, 무엇보다 돈 관련 일이니 믿을 사람이 필요했을거다. 하지만 난 그것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아버지는 운수업을 하셨다. 영업하는 사람도 두고, 배차는 어머니가 맡았으며 자금 관리하는 건 내가 하게 되었다. 화물운송중개업이었는데, 각자 영업용 화물차를 소유하고 있는 차주들이 회사에서 일거리를 받는 대신 일정한 중개수수료를 내는 그런 구조였다. 19살의 내가 견디기 힘들었던 이유가 두가지 있었다. 첫째, 회사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는 것과. 둘째, 그것을 거부할수 없었다는 .. 2015.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