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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그사람

Mrs. V

by 글쓰는 백곰 2018. 3. 1.

아이는 작년 9월, 킨더에 입학했다.

8월에 개학이었지만,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입학관련서류를 준비하는데만 해도 한달이 걸렸다.

학교에서의 첫 날,

우리는 담임선생님인 Mrs. V를 만났다.


원래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Mrs. Lee였는데

출산으로 인해 장기 휴가를 내게 되었고,

그 자리에 Mrs. V가 오게 된 것이었다.

아이를 처음 학교에 보내는 나로써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 자식이지만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고,

고집도 쎈 편이어서 과연 적응을 잘할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다.

물론 이전에도 한국에서 어린이집을 몇 개월 다닌 적은 있었다.

그러나 킨더는 다른 차원이었다.

어린이집에서는 세세한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이었다면,

킨더에서는 사회생활 훈련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킨더라고 해봤자 만 5세가 넘은 아이들일 뿐인데

엄격하게 규율을 가르치고, 문제행동은 용납하지 않았다.

특히 타인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해서

학습분위기를 망치는 경우에는 가차없었다.

우리 아이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엄마와의 분리불안으로

하루종일 울기만 하다가,

며칠이 지나니 문제행동을 일으키기 시작해

(돌아다니거나, 친구들을 밀친다거나)

학교에서 아이를 데려가라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우리 아이가 영어를 이해 못하거나 했다면

그래서인가 보다 할수도 있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아이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한국어보다 영어로 말하기를 더 좋아했다.

학습관련 유튜브를 보는 취미가 있었기 때문에

(또 희안하게 만화는 별로 안좋아한다.)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히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엄마와 아빠보다 더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결국 학교에서의 부적응 문제는

의지의 문제이며, 태도의 문제라고

Mrs. V는 강조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척척 해내는걸 보면

아이는 무척 스마트한데,

싫어하는 것은 아예 하지 않겠다고

대놓고 거절의사를 밝힌다고 한다.

손도 대지 않는다고.

담임선생님으로썬 아주 곤란했을 것이다.


결국 학부모상담을 해야 했고,

앞으로 어떻게 개선이 되고 있는지

매일매일 체크 리스트를 주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를 데리러 갈때마다

교실에 들어가 아이의 문제행동에 대해 들었고,

약 2주간의 체크리스트를 받았던 기억이다.

그것을 보고 아이에게 계속 해서 주의를 주었다.



(매일매일 받아오던 그 체크리스트)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다 하기란 불가능하니

처음에는 아이들을 아프게 하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고,

그 점이 개선되고 난 후엔

컬러링을 열심히 하자고,

그다음엔 글씨 쓰기를 열심히 하자고…

이런 식으로 아이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아이의 행동이 점차 나아지니

선생님은 이제 그냥 말로만 하루 일과를 알려주었다.

오늘은 컴퓨터 시간에 아예 수업을 듣지 않았다는 둥,

오늘은 누구를 때렸다는 둥…

문제 행동이 없는 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 아이가 하지 않은 수업내용을 모아

나에게 주며 아이에게 연습시키라고 했다.

우리는 매일매일 집에서 숙제를 해야했다.

그렇게 조금씩 아이의 학습태도가 좋아졌지만

Mrs.V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컬러링을 좀 더 꼼꼼하게 해라,

글씨를 줄에 맞춰 이쁘게 써라…

다른 아이들이 한 것을 슬쩍 보니

다들 개발새발 난리가 났더만,

유난히 우리 애만 맨날 이렇게 혼나는 것은

아무래도 처음부터 찍힌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어서 빨리 Mrs. Lee가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그분은 좀 낫다던데…



(선생님과 아이의 차이. 내가 볼 땐 장족의 발전.)


여튼…

그렇게 매일매일 Mrs.V를 만나는 것이

나에게는 정말 큰 스트레스였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알아 듣기 쉬운 단어로 쉽게 상황설명을 해주셨지만

나는 그 일대일 상황 자체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게다가 좋은 말도 아니고, 꾸중 같은 말을

아이 대신 듣고 있는 그 심정이라니.

딱히 대답해 줄 말도 없었다.

죄인마냥 듣고 있는 수 밖에.

게다가 내 아이는 원체 느린 아이여서

무언가를 바꾸려면 시간이 오래걸린다.

그러니 선생님의 관점에서는

왜 개선이 되지 않지?

엄마가 내말을 잘 못 알아 듣는가 보군,

그렇게 생각한 듯 하다.

어느 날에는, 같은 반에 있는 다른 한국인 애를 불러

자신의 말을 한국어로 내게 설명해주라고 했다.

그때의 굴욕이란. 아. 정말이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연말시즌이 다가왔다.

방학을 하기 전, 아이는 감기에 걸렸고

학교를 쉬게 되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학교에 가지 못한 채 방학을 맞이하게 될 듯 했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꽤 큰 명절이어서

주변인들에게 작게나마 감사를 표한다고 들었다.

결국 나도 작은 금액이나마 기프트 카드를 준비했고,

아이에게 억지로 카드를 쓰게 해서 혼자 학교에 다녀왔다.

아이는 아파서 못왔노라고,

그리고 Mrs. V의 대학원 졸업을 축하한다며

간단히 이야기 하고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를 왈칵 안아줬다.

환히 웃으며 고맙다고 안아주던 그녀.

깜짝 놀랐다. -.-;


그렇게 3주간의 방학을 지내고 나니

다시 학교에 적응하는게 힘들어진 아이는

또 다시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결국 또 다시 학부모 면담 요청이 왔다.

이젠 아주 지긋지긋해졌다.

아이의 책상 안을 보아하니,

엉터리이지만 어느정도는 수업을 한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다시 새로 하라면서

내게 새로운 종이를 주며 연습하라고 했다.

했던 것을 또 하려니 애는 지겨워서 몸을 꼬고,

나는 나대로 이 끝없는 전쟁이 괴롭기만 했다.

그렇게 3주가 지나자,

드디어 아이는 다시 적응을 잘 하게 되었고

Mrs.V는 다만 연습시키라며 수업내용을 다시 주기만 했다.


매일매일 숙제를 한아름 들고 나오는 나를 본

다른 킨더 엄마들은 (물론 한국인이다)

그래도 그렇게 세세하게 신경 써주는게 어디냐며

자신들의 아이는 아예 피드백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사자였던 나와 아이는 괴롭기만 한 일이었다.

학교를 가는것 자체가, 그녀를 보는 것 자체가.


그러던 Mrs. V가 떠났다.

출산휴가를 마친 Mrs. Lee가 돌아오게 된 것이다.

2월에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기에

매번 지적을 받을 때마다 Mrs. V를 볼날이 얼마 안남았다.

그렇게 위안을 하며 지냈는데,

막상 2월이 되고 보니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엄격하면 엄격한대로, 기준이 높으면 높은대로,

그녀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나중에 헤어지게 된다면 작은 선물이라도 할까,

그런 생각이 들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 날이라며 월요일에 인사를 했을 때,

다른 엄마들 사이에 파묻힌 그녀를 보며

나는 차마 다가설 수가 없었다.

간단하게라도

고마워요, 언제나 그랬어요, 그리울 거예요,

말을 건넸어야 했는데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결국 나는 아이에게 다시 한번 Mrs. V를 안아주고 오라고 했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가벼운 눈인사로 마지막을 대신했다.


그렇게 Mrs. Lee가 왔던 어제.

아이는 제일 먼저 수업을 끝내고 나왔다.

수업을 다 끝내지 못해 맨 마지막에 나오던 아이가

제일 먼저 교실을 나오는것을 보고 좀 놀랐다.

그러면서 이제 Mrs. V는 사라졌다고,

앞으로는 Mrs. Lee 라고 하며 신나하는 모습을 보니

너도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싶으면서도

저런 매정한 아이를 보았나, 싶어졌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말라고 하기도 그랬다.

사실, 너만큼이나 엄마도 힘들었거든.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 그녀에 대해 이야기해 줄 땐

아마도 이렇게 말해줄것 같다.

네 첫번째 선생님은 Mrs. V 였어. 기억나니?

그리고 말야,

Mrs. V는 엄마의 첫번째 선생님이기도 했어.

그분 덕분에 엄마 영어도 조금 나아졌거든.

그러니 우리는 그녀에게 감사하게 생각해야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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