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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희.노.애.락.

영어 이름을 지어보자

by 글쓰는 백곰 2018. 4. 10.

미국에 오기 전부터 고민했던 것이다.

영어 이름을 지어야겠다고.

딱히 마음에 꽂히는 이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 이름이 발음하기 힘든 편이라

부르기 편한 이름이라도 하나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사실상 서류 상의 이름은 한국이름 그대로지만

가끔 물건을 주문할 때 이름을 묻곤 하기 때문에

쉬운 영어 이름이 있어야 했다.

가장 흔한 건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다.

어제도 이름이 무어냐 묻길래

“Lucy”라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커피가 나온 것 같아 찾으러 가보니

내 것이 아닌, 내 것 같은 커피가 있었다.



컵에는 “Chrisy” 로 써 있었다.

설마 다른 사람 건가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톨사이즈의 카페라테 디카페인을 먹는 사람은

흔치 않을 거란 확신이 들어 말없이 들고 왔다.

그리고 나의 후진 발음을 뉘우쳤다.

그런데 그것도 참 웃긴게,

며칠 전 주문엔 제대로 “Lucy”로 써있었다.

뭐지? 그때 주문 받은 사람이 인도인이어서 그런가?

직원마다 외국인의 발음을 알아듣는 스킬이 다른걸까?


여튼… 나는 이름을 짓긴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가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그래서 남편과 이런저런 이름들을 늘어놓고

하나둘씩 검토해보기 시작했다.


메리 - 언제나 즐거울 것 같아서 별로.

바버라 - 왠지 코가 크고 노래를 잘해야 할 것 같고.

아멜리아 - 괴짜스러운 프랑스소녀 느낌이고.

힐러리 - 남편이 속 썩일 듯.

쟈넷 - 노출증이 있을 것만 같아.

샐리 - 이번 생에 해리 만나긴 글렀어.

핼렌 - 그잖아도 평소에 잘 안들리는데.

캐롤 - 언제나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겠어.


너무 흔해서 그 이름을 떠올리는 인물들이 자동으로 연상되고

도대체가 어떻게 해볼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 이름을 “Lucy” 라고 정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영화 ‘당신의 잠든 사이에'의 주인공 이름이고,

만화 찰리브라운의 까칠한 여자친구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 익숙한 느낌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하기로 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올드한 이름이라는 걸 여기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한국 이름의 발음과 비슷한,

약간 중성적인 이름의 “June” 을 쓰기로 작정하고

스타벅스에서 실험해 보았는데

역시나 나의 어눌한 발음은 엉터리 이름을 창조해냈다.

종이컵에 쓰인 이름을 보니,

나조차도 읽기 힘든 알파벳의 조합이 써있었다.

이러니 듣는 사람은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싶다.


나는 내 한국 이름을 바꿀 계획은 없다.

물론 내가 선택해서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나중에 시민권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고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꼭 실명을 써야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고,

영어 이름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각기 나라마다 영어 이름에 대한 생각들이 다르다.

인도인들은 그 어렵고도 긴 인도이름을 그대로 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름을 영어로 많이 바꾸는 편이다.

한국인들은… 글쎄. 얼마나 여기서 오래 사느냐에 다르겠지만

반반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관찰해본 결과, 이민 1세대는 바꾸지 않는 듯 하다. (서류상으로)

그러나 미국에서 공교육을 받는 세대부터는 영어 이름을 쓰는 듯 하다.

뭐, 어느 쪽을 택한다고 해서 애국심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고,

각자 편할 대로 사는 게 장땡이다 싶다.


미국 이름에 대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게 하나 있다면,

Mrs.라고 불리는 것이다.

뭐랄까. 남편의 성으로 귀속되어버리는 그런 것.

미국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 왔다고 해서 내 성이 남편성이 되는건

생각보다 그럴싸하지도, 맘에 드는 일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

미세스 * 이라고 부르지 마시라,

나를 그냥 이름으로만 부르기를.


그나저나… 어쩔까나.

두 이름을 열심히 발음 연습해보고

또다시 실험해봐야 하는 걸까.

거참, 커피 한잔 마시기 힘들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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