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끝이 안보일 것 같았던 여름 방학이 끝났고
새학기가 시작된지 어느덧 3주가 지났다.
매일매일 아이와 하루종일 붙어 뒹굴거리다 보니
개학날이 다가오자 오히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홈스쿨에 자리가 나서
아이는 또 다시 전학을 해야했고,
좋은 선생님을 만날수 있을까 그런 걱정도 들었다.
처음엔 조금 삐걱거리는 모습에 불안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학교에 잘 적응해가는 듯 하다.
아이는 서서히, 하지만 정확하게
그렇게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나의 개인적인 시간을 버리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낸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게 아닌가 싶다.
뭔가를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대단히 근사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 긴 여름 방학,
우리는 쓰레기를 같이 버리러 가고,
우체통에 누가 먼저 가는가 달리기 시합도 하고,
똑같이 마스크를 낀 채 화장실 청소를 함께 했다.
볶음밥을 같이 만들었으며,
뜨거운 햇빛 속에서 함께 땀을 흘리며 놀이터에서 놀았다.
함께 한 모든 시간들이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갔고
나는 그것들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임을 깨닫는다.
나는 이번 여름 방학동안 여러번 비슷한 꿈을 꾸었다.
그 꿈 속,
거기엔 아프지 않은 우리 엄마가 있었고
아빠도 엄마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한,
딱 15년 전의 어떤 하루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그런 보통의 일상이었다.
다른 꿈들처럼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함께 밥을 먹었고,
자질구레한 일상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꿈이 여름방학동안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의아하기만 했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그렇게 몇번을 갸웃하다가, 마지막 꿈을 꾸고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아, 그게 내 행복의 날들이었구나.
그 평온하고도 당연했던 날들이,
내게는 무척 사랑스러운 날들이었구나
이렇게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은 순간이었구나.
어릴 적엔
무슨 특별한 이벤트가 있던 날,
평소와 같지 않았던 어떤 날이 기억에 선명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지난 날을 되돌아 보니
그 보잘 것 없던 일상의 것들이 너무나 반짝이었던 것임을 깨닫는다.
바닷가에 당연히 깔려있는 수많은 모래알들과
끊임없이 오가는 파도들이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 같아 평범하게 느껴지지만
해가 지기 전,
햇빛을 받아 그윽하게 반짝이는 순간엔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처럼,
일상은 어느 순간 감격적인 것들이 되어버린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고 이별할수 있는게 인생이라는,
그런 뻔한 전제들을 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때로는 그 뻔함이 주는 감사함이라는 게 존재한다.
68일.
숫자로는 너무나 길어보이는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너무나 짧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의 어느 순간도 후회하지 않는다.
영어 좀 못하면 어때,
읽고 싶었던 책 좀 못 읽으면 좀 어때,
너의 인생 언제고
심지어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에도
이렇게 어느 순간 기억될수 있다면
그게 내가 가질수 있는,
너에게 줄수 있는 유일한 선물인걸.
나는 행복했던 날들 속에서 존재하고 싶고,
너의 행복한 날들과 함께 하고 싶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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