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사/희.노.애.락.

짧은 귀국 - 첫째 날

by 글쓰는 백곰 2020. 1. 16.

지난 11월 말, 짧게 한국에 다녀 왔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시점에

즉흥적이다 싶게 출발한 여정이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슬픈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미 슬픈 일이 생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내가 간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단지 그 옆에 잠시라도 있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급하게 알아 본 한국행이었다.

때마침 추수감사절 시즌이어서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혼자 갈 수 있었다.

월요일에 출발해서 일요일에 도착한 5박6일 일정이었다.




혼자서 여행을 가본 적이 없던 터라(국내, 해외 모두 통틀어)

어안이 벙벙한 나를 위해 남편이 모든 일정을 짜주었다.

여행 준비 기간에도 아무 생각이 없다가,

비행기를 타려고 터널을 들어서는 순간

‘어서 오십시오’라고 인사하는 한국승무원들을 보니

아, 내가 내 고국으로 가고 있는 게 맞구나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언젠가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 가게 된다면 나 혼자 가고 싶다고.

가족들과 함께 가면 나만의 시간을 갖기 힘들고

친정과 시댁 모두 들러서 의무방어전을 해야 하고

이래저래 나는 하나도 좋을 게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비용과 타이밍 문제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는데,

이런 뜻밖의 비보로 가게 된 것이 착잡할 뿐이었다.

그렇게 2년 반 만의 한국행이었다.


가장 중요한 여행 목적은

슬픈 친구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에 가게 된 김에 

내가 해야 하는 여러가지 용건들도 해결해야 했다.

은행업무, 시력검사 및 안경 맞추기, 여러사람과의 만남등…

화요일 밤에 도착해서 토요일 오후에 떠나야 하니 

일정이 너무나 빡빡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수원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밤 8시가 넘어 있었다.


우선 해결해야 할 것이 은행 업무였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 일찍 움직이기 위해 숙소를 수원으로 잡았다.

요즘은 은행관련 업무를 아무 지점에서나 볼 수 없다고 한다.

직불카드를 재발급 받으려고 했더니,

그 은행 계좌 개설 지점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미리 예약해 둔 호텔에 짐을 맡기고,

유일하게 만나고 싶었던 분을 만났다.

내가 수원에서 외롭게 지낼 때

여러모로 의지가 되어주셨던, 언니같은 분이다. 

그분의 자녀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어서

작년 초, 미국 우리집에 애들만 오기도 했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여전히 쾌활하셨고, 푸근하셨고, 눈웃음이 다정했다.

우리는 헤어져 있던 시간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눴는데

너무 허물이 없는 탓이었을까,

주로 속상한 이야기들만 늘어놓았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래도 지금은 잘되었다며,

앞으로는 더욱 좋아질거라며, 

다소 뻔하고도 바람직한 결말을 내려고 애썼다.

뭐, 그게 나빴다는 게 아니다.

그저 나는 그 얼굴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언제나 나를 염려해 주던,

그러다 이내 괜찮아질거라며 씨익 웃어주던 그 얼굴을.

나는 그 얼굴 앞에서는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나의 맨얼굴을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약 3시간만에 그분과 헤어졌다.

아쉽고도 충분한, 묘한 시간이었다.

호텔에 돌아와 좁은 객실에 홀로 누워 

지금 내가 어느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지,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잠시 혼란스러워하다가

이내 서서히 눈이 감겼고

그렇게 첫날이 끝났다.



'일상사 > 희.노.애.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짧은 귀국 - 셋째 날  (3) 2020.02.04
짧은 귀국 - 둘째 날  (3) 2020.01.22
기찻길 옆 오막살이  (5) 2019.11.12
행복했던 날들  (4) 2019.09.22
미국 독립기념일에  (3) 2019.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