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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희.노.애.락.

기찻길 옆 오막살이

by 글쓰는 백곰 2019. 11. 12.

우리집 바로 옆에 기찻길이 있다.

기찻길이라고 해서 무슨 펜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철도가 길에 노출되어 있다.

물론 정지 신호를 알리는 신호등은 있지만,

조금만 정신을 놔도 사고가 나겠다 싶을 정도로 허술해 뵌다.

걸어 다닐 일이 없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 쓰진 않았다가

아이가 새학기부터 학교를 옮긴 바람에 

요즘은 가끔 함께 걸어다니며 그 길을 지난다.

남편은 어지간하면 차로 다니라고 하지만,

혈기 넘치는 아이는 때때로 킥보드를 타며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가끔씩 그렇게 등교를 하기도 한다.



집을 구입하기 전,

옆에 기찻길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뭐 그게 대수인가 싶었다.

오픈 하우스에 당시에는 

기차 존재 여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살다보니 어마어마하게 시끄러워

짜증이 나곤 했었다.


우리집 근처 철로에는 화물기차, 여객기차 등

여러 종류의 기차가 다닌다.

문제는 이들이 지나가면서 경적을 울린다는 거다.

각자 경적의 소리와 크기도 다르고,

그 지속시간도 다르다.

우리가 관찰해본 결과,

평일에는 좀 덜하지만

주말에는 유난히 시끄럽게 경적을 울린다.

아마도 남들 노는 주말에 놀아서 화가 많이 난 모양이라고

지금은 사람 좋게 허허 웃어넘기는 지경에 이르긴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문을 닫고 있는 집안에서 내 목소리가 안 들릴만큼

큰 소리로, 그것도 아주 길게 경적을 울리는 기차를 만날 때면

나도 모르게 ‘저놈의 기차!’ 하고 화를 내곤 했다.

주택가를 지나면서 저게 무슨 매너인가, 짜증이 훅 치밀었다.

(요즘은 아들이 ‘저놈의 기차!’ 하며 소리를 지른다)

게다가 가끔씩 새벽 두세 시쯤에 경적을 울리는 기차도 있다.

또한 2층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있노라면

기차가 지나갈 때 집전체가 흔들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 때문에 작은 지진이 나는 것은 잘 감지하지 못하는 지도.)

처음에는, 집을 잘 못 샀구나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인간의 적응력이란 무서운 것.

새벽에 시끄러워도 어지간해선 깨지 않게 되었고,

내 목소리가 경적소리에 묻히면 그냥 잠시 말을 멈추고 지나가길 기다린다.

어쩌겠는가. 

우리 형편에 이런 집을 얻은 것만 해도 기적적인 일인 것을.

그냥 익숙해지기로 한다. 마음 먹으니 안될 것도 없다.


언젠가 남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기찻길 근처에 한달에 한번꼴로 인명사고가 난다고.

그래서 여차하면 경적을 울리는 지도 모르겠다고.

하긴… 뭐…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다.

가로등도 없는 밤에, 뭐가 보이겠는가.

노숙자가 철로에 갑자기 들이칠수도 있고,

주정뱅이가 자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래, 우리의 인내심이 인명을 구한 것이다!  이해하자…


며칠 전, 한국TV 프로그램에서

미국 대륙횡단기차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서부에서 동부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는데

기차 객실마다 화장실과 침대가 있는 구조였다.

어느 노부부는 손주들을 위한 장난감을 짐 한가득 싣고 있었고,

어떤 젊은이는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풍경을 보는 등

각각 그들만의 여행을 여유롭게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기차여행의 낭만이랄까,

밖에서 지켜보는 자가 아닌

안에서 즐기는 자의 기분이 살짝 느껴졌다.

그 때부터인가, 

똑같이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를 봐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다. 신경질도 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저기에서 설레는 기분일 테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기찻길에서 한 달에 한 번 꼴로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남편의 말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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