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마음이 늘 조급했다.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약속한 일들이 많아서
빡빡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시간적 여유가 생겨버렸다.
그래서 그동안 미뤄놓았던 일들을 하나씩 해치우고 있는 중이다.
외식이나 야외산책 등
활동이 자유롭지 않으니 집안일을 주로 하고 있다.
월요일엔 아침 일찍 한국마트에 가서 한국 채소들을 사왔다.
보통 쌀, 물, 휴지, 세정제 등을 사재기하듯 쓸어 담던데
다행히도 우리집은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쌀은 큰 포대를 산지 며칠 되지 않았고,
한국에서 배송시킨 현미쌀도 넉넉했으며,
집에 정수기가 있는 탓에 물을 살 필요도 없었고,
손세정제보다는 그냥 손을 열심히 닦는게 낫다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서두르는 상황속에서
나름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한식은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것일까...
모든 양념에 들어 가는 파, 마늘을 손질하고,
한 상자의 멸치똥을 따고,
대용량으로 사놓은 채소들을 깨끗히 씻어 냉장고에 소분하고.
며칠 전에는 현미밥을 하려고 보니
쌀벌레들이 포장지 안에서 파티를 벌이고 있음을 목격,
버려야 하나 20분 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쌀벌레 먹은 쌀도 먹을 수는 있다길래
깊은 한숨과 함께 하나하나 제거 작업을 시작했다.
현미쌀 3Kg,
좀 미련한 짓 아닌가 싶었지만,
이 시국에 식량을 버린다는 게 선뜻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이 현미쌀은 한국산이란 말이다…
미국 현미쌀은 물에 담궈 놓아도 비소가 없어지지 않기에
큰맘 먹고 산, 한국에서 선박택배로 받은,
귀하고도 귀한 양식이란 말이다.
덕분에 한 시간동안 살생을 감수해야 했지만...
어쨌든 다 정리한 후 냉장실에 넣어 놓으니 왠지 뿌듯했다.
또한 시간이 나는 대로 식빵도 많이 만들어 놓고 있다.
그렇게 냉동고에 음식들을 꽉꽉 채워놓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든든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만만한 우유식빵, 한 번에 두통 구워 자른 후 냉동실로)
이런 저런 집안 일을 하면서,
음악을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야외 산책을 할 때는 주로 팟캐스트를 듣는 편이고
(혼자 걷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말 상대 대신하여)
집에서 일을 할 때는 주로 음악을 듣는다.
일종의 노동요라고나 할까.
요즘은 애플뮤직에서 ‘90년대 K-pop’를 검색해 듣고 있다.
10대와 20대에 들었던 음악들이다.
그 때의 음악들은 세월이 흘러도 가사를 완벽히 외우고 있다.
몇 십번이고 돌려 들어서 그런건지,
요즘처럼 가사가 길지 않은 멜로디 위주여서 그런건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기억들이 가미되어 그런건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애틋한 시기의 노래들이다.
최근에는 조규찬을 듣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샀었던 음악 테이프가 조규찬1집이었다.
첫정이 무섭다 했던가…(?)
그 이후로도 그의 음악은 열심히 챙겨듣는 편이다.
야채를 다듬으며 조규찬 1집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17살의 감성이 불쑥 튀어나와 흠칫 놀랐다.
그때의 나는 맨날
뭐가 그렇게 신경쓰이고, 괴로운 일 투성이었는지...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선명한 그 감정들 때문에
마치 멀미하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음악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추억으로 순간 이동을 시켜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며칠간은 아련한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걸 보면.
그 때 같은 노래를 좋아했던 그 아이는,
내 속에서 영원히 20대로 남아있는 그 젊음의 상징은,
활짝 웃어주었지만 때로는 한없이 진지하던 그 모습은...
이제 와 궁금하다고 찾아보면 안되는 거겠지?
뭔가 반칙을 저지르는 듯한 느낌이 들고,
나의 과거에도 못할 짓이 되어버리는 느낌이 든다랄까.
어느 순간 멈춰버린 것들이 오히려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내가 나이를 들어서인걸까…?
이렇게 온갖 상념들로 시간을 보내는 요즈음이다.
뭐, 나쁘지는 않다.
원래부터 집순이었던 사람은
대질병이 도는 이런 상황에서도
괜히 센치해지기나 할 뿐이지, 아주 멀쩡히 잘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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