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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희.노.애.락.

문자중독자의 삶

by 글쓰는 백곰 2023. 10. 1.

남편과 함께 뉴스를 보고 있던 어느 날,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같은 영상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남편은 뉴스 앵커가 하는 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화면에 작게 지나가는 자막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남편은 이내 불편하다는 듯 내게 지적했다.

“누가 문자 중독자 아니랄까봐…”

 

처음에는 좀 비약이 심한거 아닌가 생각했다.

남자는 원래 한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그와는 달리 여자는 멀티가 가능하다던 어떤 썰을 떠올리면서.

네가 단순한거야 라고 즉각 쏘아붙이려다가 

잠시 내 행동을 되짚어 보니 남편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문자 중독자.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글씨 자체를 쓰는 것도 무척 좋아한다.

내 눈에 펼쳐진 활자는 모두 내 눈에 담겨야 하며

그것은 이내 해석이 되어 내 소유가 되어야 한다.

이런 성미의 사람인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이 낯선 미국에 와서

낯선 단어, 낯선 문장배열, 낯선 화제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순간순간이 패닉이고, 순간순간이 위기였다.

지금은 그런 순간이 닥칠 것을 대비해가는

실력이 아닌, 요령만 늘은 상태지만 말이다.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간지 벌써 한달이 넘었다.

그 적응을 도와주기 위해 나도 열심히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는데

몇문장 읽다가 덜컥, 혹은 몇단어 읽다가 덜컥,

모르는 단어들때문에 브레이크가 걸리곤 했다.

그걸 눈으로만 읽으면 또 기억이 잘 나지 않기 때문에

교과서를 통째로 쓰고, 해석했다.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고, 발음기호를 적어가면서.

나는 머리가 좋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뭔가를 배워야 할 때는 필기를 해야 한다.

손으로 활자를 써내려 가야만, 뇌에도 새겨 진다랄까.

때문에 정말 수고스럽고,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만

학습에 있어서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난 2주 동안 교과서 62장을 쓰고 해석했다.

아마 일반인이라면 엄두도 못냈을 일일테지만,

문자중독자인 나에게는 해볼만한 도전이었다.

 

학습을 하는 것도 좋아하고

(물론 좋아하는 분야여야 하지만)

종이에 글씨를 가득 채워 넣는 것도 좋아한다.

펜글씨 쓰는 것도 좋아하고, 

그렇기 때문에 여러가지 필기구들을 모으는 것도 좋아한다.

한창 공부를 열심히 하던 대학시절에는 

펜 하나가 이틀을 버티지 못했다.

그렇게 닳아버린 필기구가 늘어날 때마다,

글씨로 가득찬 이면지들이 쌓여갈 때마다,

작은 업적이라도 쌓은 듯 뿌듯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언젠가 성경필사에 대한 블로그를 올리기도 했는데

나는 아직도 성경필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종이에 쓰던 1회,

각 잡고(?) 노트에 공들여 쓰던 2회,

공부할 겸 영어로도 해보자 해서 3회,

이번에는 영어필기체로 4회째 필사를 이어가고 있다.

성경필사를 영어로 했던 것은 여러모로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어로는 표현되지 못하는 어떤 언어적 한계가

영어로 쉽게 풀이되는 부분이 꽤 많았다.

한국어성경은 한자어와 축약어가 많은 데에 비해

영어성경은 쉽게, 풀어서 쓰여진 느낌이랄까.

나는 아마존의 킨들(전자책)로 영어 성경을 보고 있는데

단어마다 영영사전을 찾아볼수 있다는 점이 무척 편리하다.

그래서 성경을 쓸 때는 한글성경, 영어성경을 동시에 펴놓고

우선 영어성경 한 구절을 읽고 나름대로 머리속에서 해석하다가

한글성경을 보고 맞는지 확인한 다음,

영어로 다시 써내려 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어떤 영어를 맞닥뜨리게 되어도 좀처럼 당황하지 않게 되었다.

영어 실력이 아주 좋아졌다고 말할 순 없지만

영어 울렁증으로 간단한 지시어조차 못알아듣던 내게

아무리 긴문장이 나와도 당황하지 않는

영어에 대한 맷집을 키워줬다랄까.

다 이해할 순 없어도, 

섣불리 포기 하지 않게 되는 어떤 끈기 말이다.

그 속에서 되도록 내가 아는 것들을 찬찬히 헤아려 보고

영 답답하면 단어를 다시 찾아보고… 그렇게 또 배우고.

그래서 나는 영어성경필사를 2번째 하는 중이다.

 

(요즘 쓰고 있는 "열왕기상')

 

한때는… 머리가 좋아봤으면 좋겠다… 라고

침침해지는 눈과, 피곤해지는 손목을 보며

한탄하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보다 두세배는 노력해야 하는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어쩌면 그런 나 자신이기 때문에

중년과 노년이 심심치 않을수 있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가장 주부의 삶이란 정말 업적 없는 삶이다.

살림이라는 것이, 안하면 티가 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집안일들의 반복이 

나의 유일한 공로가 되는 건

다소 서글픈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 일상속에서 

내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럴때마다 나는, 

책상 위에 쌓여있는 노트와 펜들을 보곤 한다.

그제서야 안심하게 되는, 

나란 사람의 성장.

아직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는 그 흔적들은

그렇게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작은 위로가 되어준다.

그러니…

문자중독자로의 삶은 오명이 아닌 명예같은 거라고,

나는 오늘의 나를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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