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산책

여기 오스틴에 온지 4개월이 넘었지만

정작 여기가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했다.

처음 한달은 필요한 살림살이를 사느라 바빴고,

나머지 기간동안엔 산책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이것저것 사고 싶은 것도,

궁금한게 없었던 것도 아닐텐데,

뭔가 확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여버리면 안될것만 같은

어떤 강박같은 것이 있었던 듯 싶다.

국민연금을 중도해지해서 목돈은 생겼지만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는 

무엇하나 사기가 망설여졌다.

게다가 또 이사를 할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살림살이를 더 늘이기도 애매했다.

우리는 이렇듯 

반강제적인(?)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래서인가,

남편의 소원은

오스틴의 상업지구라고 할수 있는 도메인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거였다.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꼭 무언가를 사고 싶어서가 아니라

동네의 번화가에서 사람들을 보면서

스타벅스에서 시원한 차 한 잔 마시고 싶었단다.

오늘 오후, 드디어 소원성취를 하자며

가족모두 도메인으로 향했다.

(오랜만의 외출에 신난 아들)

여기 텍사스는 요즘 37도에서 40도까지의 폭염을 자랑하는

무시무시한 여름날을 이어가고 있다.

그놈의 소원 수리가 뭣이라고...

하필 기온이 가장 농축된 오후 4시에 움직여서는

홀푸드 주차장에서 도메인 중심가로 걸어가는 길은

완전히 죽을 맛이었다.

한국과는 달리 습도는 낮은 편이지만,

햇빛이 정말 강한 곳이기 때문에

30분만 있어도 피부가 타 버린다.

자외선 지수 110의 썬크림도 뚫는 송곳같은 햇빛,

그것을 고스란히 받으며 걸어가는데

슬슬 도끼로 내 발등을 찍고 싶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얼마안가 스타벅스에 도착하게 되었고

프라푸치노 하나를 들이키고 나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남편이 스타벅스에 들어간 사이,

밖에 있는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가 문득 놀이터를 보더니 가자고 조른다.

생각해 보니 이 나라에 와서

한번도 놀이터에 간 적이 없었다.

원체 몸이 약한 편이라 질병에 걸릴까봐서,

게다가 뜨거운 날씨에 외출 자체가 꺼려져서...

그런데 저렇게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니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들도 익어가는 중... 볼이 발그레하다)

참... 이게 뭐 어려운 거라고,

그렇게 바깥 한번 나오기가 힘이 들었나.

뭐 그렇게 망설여질 일이었나 싶은게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남편과 나는 결혼 당시에 빈 손이었고

되려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들처럼 부모 덕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두분의 생활비와 병원비까지 모두 감당하는

어려운 신혼시절이었다.

그래도 악착같이 모아 작은집이나마 마련했고,

어느정도 목돈을 준비해 놓은 후에야

아이를 낳을수 있었다.

아프신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 일은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또래의 다른 부부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아껴야 했고, 절제해야 했다.

호기심도 눌러야 했고,

무언가를 하나 살 때도 몇 번을 고민해야 했다.

그런 생활이 몸에 배어서 인가,

분가를 하고 난 후에도 소비는 늘지 않았다.

그냥 그런 패턴이 굳어져 버린 것이다.

미국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물론 남편이 취직 전이어서 소득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물질생활을 즐길 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글쎄...남편은 아니라고(?) 할지도...

나만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도메인으로의 산책을 하고 보니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미뤄왔어야 했나 싶다.

앞으로 오스틴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막 사먹고(?)

궁금한게 있으면 직접 가서 구경해야 겠다고

몇번을 다짐하고 돌아왔다.

오늘 산책은

햇빛에 피부가 쓰라리긴 했지만

그동안 움츠러져 있던 마음이 나른하게 풀렸던,

미국에서의 첫날이었다.

우리식구의 첫 휴가가 이제서야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