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사/희.노.애.락.

산책

by 글쓰는 백곰 2019. 6. 21.

우리 동네엔 큰 호수공원이 하나 있다.

호수를 따라 걷다보면 50분 정도 소요되는데,

제법 운동도 되고 기분도 상쾌해져서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우리집에서는 거리가 있지만

아이 학교에서는 가까운 편이기 때문에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바로 산책을 하곤 했다.


여러가지 운동을 시도해 보았지만,

가장 몸에 맞는 것이 산책인듯 싶다.

그래서 틈이 나는 대로 아침마다 꾸준히 걸었다.

그래봤자 아이 방학이 시작되면 하고 싶어도 못할테니 말이다.


운동을 같이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원체 혼자 지내는 게 익숙해져서인가

그냥 내 스케쥴 대로 혼자 하는 게 편하다.

어디서 몇시에 만나자는 약속을 하는 것 자체가

내 산책 여부에 큰 변수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냥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혼자 걷는 것이 좋다.


내가 즐겨 듣던 팟캐스트는

송은이 김숙의 ‘비밀 보장' 과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었다.

‘비밀 보장'은 나름대로 유쾌한 맛이 있어서 들었고,

‘빨간 책방'은 책을 좋아하는 내 기호에 딱 맞았다.

그리고… 외국에 살다보면 한국어가 듣고 싶은 법이다.

타국에서 나와 코드가 맞는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고

아직도 너무나 조심스러운 생활이다 보니

지식과 유머에 대한 정서적 갈증이 나날이 심해졌다.

그러다가 남편의 권유로 팟캐스트를 듣게 되었다.

우선 내가 듣는 팟캐스트들은 진행자들이 내 취향에 맞는다.

어떤 날은 재미있고, 어떤 날은 곤혹스러울 정도로 지루했지만

그러면 그런대로 나의 산책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친구라고 해서 매일 컨디션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물론 설거지 할 때나 요리할 때도 듣긴 하지만.

요즘은 모든 에피소드를 다 들어버려서

‘지대넓얕'을 새로 뚫었다. 나름대로 건조하고 재밌다.


(2주 전엔 흐린 날이 많았다)


봄이 되자 오리들이 몰려와 호수 공원을 점령해버렸다.

이것들이 어찌나 많은 배설물을 뿜어대는지,

산책길은 오리 똥밭이 되어버렸다.

그 지뢰밭을 피해다니면서 가끔씩 짜증이 나다가도

깃털이 나뒹구는, 야생동물에게 잡아먹힌 흔적을 보게 되면

저들의 생도 참 가련하지 싶어 마음이 짠해진다.

(한마디로 별의별 잡생각을 많이 한다)


캘리포니아는 햇살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썬그라스를 쓰고 산책을 하는데,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얼마나 다양한 이들이 존재하는 세상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워낙 개성들이 다르다 보니, 오히려 특별히 튀는 느낌이 없다랄까.

다만 인종마다 선호하는 옷이나 어떤 패턴들이 다소 남아있긴 하지만

그건 살아옴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 일뿐

어떤 특이점이 되는 것 같진 않다.

수많은 남녀노소, 다양한 인종들을 지나치면서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라는 동질감마저 든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인데,

어쩌다가 이곳 한꼭지점에서 만나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 시간과 공간의 일치라는,

어쩌면 굉장하고도 하찮을 수도 있는 그런 인연 속에서

나는 어느때보다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인간도 광합성을 하는 것일까,

햇빛을 받고 천천히 다리를 움직이다보면

자연스럽게 몸의 피로가 생성되는데

그로인해 오히려 우울했던 상념들이 한쪽으로 밀려나고,

당장의 갈증과 노곤함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워 버린다.

정신이라는 것이 육체에 비해선 얼마나 하찮을 수도 있는지,

지극히 동물적인 상태야말로 정신건강엔 가장 좋다는 역설.

그것이 인간도 광합성 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아이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겨우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그 산책길이 너무나 그립다.

그러나 별 수 있겠나…

아직도 68일의 방학이란 억겁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을…


'일상사 > 희.노.애.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덧하는 남자  (10) 2019.06.29
우리 동네에 불난 날  (0) 2019.06.26
미국병 유발자  (6) 2019.06.20
미군전투식량 - MRE  (6) 2019.03.29
미국 오락실 Dave & Buster’s  (2) 2019.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