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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희.노.애.락.

미국병 유발자

by 글쓰는 백곰 2019. 6. 20.

약 2주 전에 남편 친구가 집에 다녀갔다.

대학동기인데, 회사일로 일주일 출장을 왔다가

그냥 가기는 뭐해서 하루정도 관광을 할 예정이라 했다.

그러면 괜한 돈 들이지 말고 우리집에서 하루 정도 묵으라 했다.

남편이 그렇게 권했지만, 숨은 권력자(?)인 나의 승인이 있었다.

손님이 온다고 하면 대대적으로 청소를 해야하고,

다시 손님방을 재정비해야 하므로 좀 바빠진다.

약간 수고로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하루 정도는 남편과 방문자를 위해 허락해 줄 수 있는

나는 제법 아량이 넓은 여자. ㅋㅋㅋ

 

남편은 IT업계에 종사하는데,

실리콘 밸리가 있는 산호세엔 IT 관련 기업이 많다.

남편과 같은 전공을 한 대학동기들이나

전에 다니던 회사 사람들이 자주 출장을 온다.

어떻게 소문이 난건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남편과 친분이 있는 이들은 연락을 해온다.

솔직히 남편은 평소에 연락하는 친구가 많진 않았는데,

연락해 오는 사람을 무시할 정도로 매정한 성격도 아니어서

그들에게 연락이 오면 꾸준히 만나주고 있다.

그렇게 남편을 만난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100% 미국병에 걸리게 된다.

 

미국병.

그 무섭다는 미국병.

미국에 올 때까지 계속 앓게 된다는 무서운 병.

우리 남편도 그 미국병에 걸려 앓았던 적이 있었다.

미국에 오고는 싶은데, 방법이 없는 것 같아 끙끙대던 시절이.

무슨 상사병을 앓는 것 처럼 일상을 지배해 버리는 지독한 병인데

이민 희망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면 활짝 좋아졌다가,

문턱이 높다는 것을 다시 깨달으면 세상 그렇게 암울할 수가 없다.

옆에서 보고 있는 내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결국 NIW라는 방법을 알게 되어 이민을 추진하게 되었고

우리도 미국병의 지난한 과정을 겪어왔기에

친구들의 미국병에 마냥 격려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남편 친구들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전염되는 구조를 가졌다.

미국으로 출장(혹은 여행)을 와 보니

미국이란 나라가 가진 근사함에 각성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캘리포니아는 날씨도 좋고, 한국 인프라도 적당하며

여러모로 평화롭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우선 공기가 신선하고, 맑은 날씨가 많다는 것이

사람의 기분을 얼마나 상쾌하게 만드는지.

며칠 지내다보면 슬슬 궁금해지는 것이다.

‘비슷한 학력, 비슷한 업종, 비슷한 나이…

친구도 했는데,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들은 그렇게 본격적으로 미국생활의 실상에 대해 궁금해 하고

남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선에게 성실하게 대답해 주고 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 중 대다수는 현재 미국이민을 추진 중이다.

그래서 나는 남편을 ‘미국병 유발자'라 생각한다.

 

미국도 수 많은 단점이 있고,

이민자로서의 삶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큰 건

우리 나이가 갖는 애매함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40대 초반이라는 나이는

어느 하나 산뜻하게 결정할 수 없는 특유의 무거움을 가졌다.

이직을 하기에도,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도,

사회적 시스템이 결코 호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 보니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서 일상을 통째로 걸어버리는 모험을 하기도 힘들며,

그렇다고 현 시스템에 안주하기엔 뭔가 불안하기만 하다.

아무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삶이랄까.

그러다가 이민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카드를 보게 되면

새로운 길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드는 게 아닐까.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각자 개개인의 사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민이라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기 때문에

가정의 화합이 제대로 이루어지 지지 않으면 안된다.

부부의 한쪽은 이민을 지지한다, 한쪽은 싫어한다,

이런 케이스의 경우는 차라리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마저도 정확히 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면서 일을 진행하는 경우,

가장 최악의 경우가 발생한다.

이민 허가를 받았는데도, 마지막엔 안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가정을 포기하느냐, 이민을 포기하느냐

선택하게 되는데,

그 어느것도 평안한 결론이 되지 못한다.

무엇이든 서운함이 남을 것이고, 그것은 앙금이 될테니까.

 

남편의 대학친구는 일주일간의 출장에서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는지 감기까지 걸려 고생했다고 한다.

시차 적응도 힘들고,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들…

우리 집에서 한식을 먹으며 드디어 살것 같다고 했다.

여기서도 이렇게 먹고 살 수 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여튼…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 좋다고, 가기 싫다고 중얼거렸다는 친구.

오래간만에 가족들과 헤어져 산뜻한(?) 시간을 보내서인지,

미국이 진정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미국병 걸린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되었다.

뭐, 솔직히 우리가 이민오라고 부추긴 건 아니지 않은가,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답만 해준 것일뿐.

글을 쓰고 나니 갑자기 한가지 의문이 든다.

잠깐, 설마...

우리집에 들렀던 사람들의 미국병에

나 역시 일조를 한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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