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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희.노.애.락.

휴지, 마스크, 그리고 남편

by 글쓰는 백곰 2020. 4. 4.

나날이 뉴스 보기가 두려워진다.

공포는 사람을 불안으로 치닫게 하고

조용한 일상마저 거칠게 흔들어 놓는다.

미국 뉴스를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한국 역시 미국 소식이 많이 나오므로

어느 순간부터는 뉴스 보기를 아예 포기해버렸다.


캘리포니아는 3월 중순부터 집에 머물라는 행정 명령이 떨어졌고

그로 인해 학교와 회사들이 폐쇄되고

각기 가정에서 학업과 일을 이어가고 있는 상태다.

우선 5월 4일까지 집에 머물라고 했는데,

사태가 나날이 심각해지는 듯 싶더니만

어제 밤, 여름방학까지 학교를 폐쇄하기로 했다는

지역교육청의 메일까지 받았다.

즉, 이번 학년은 등교 자체를 할 수 없으니

방학을 포함한 8월 하순까지 

나는 꼼짝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되면 이 현상이 8월까지 지속된다는 가정을 세우고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 다시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동안 집에만 있으니 상대적으로 먹는 양은 많아지고

어차피 신선식품은 사야하니 마트에 가긴 했다.

여전히 보관성 좋은 식품들 (밀가루, 파스타, 스팸 등)은 동나있고,

휴지 코너엔 먼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며칠 전과 다른 분위기였던 건

마스크를 쓴 사람이 많이 늘었다는 것이고,

그걸 눈치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흠… 우선 가장 걱정되는 문제는 두가지이다.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물자,

화장지와 마스크다.

화장지는 마트를 열심히 돌아도 살 수 없고,

마스크 역시 구하기 어렵긴 마찬가지이다.

집에 두가지 품목 모두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한두달 지나면 위기감이 엄습할 정도의 양이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화장지는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중국산 휴지가

말도 안되는 가격에 아주 조금씩만 팔고 있었고,

마스크 역시 믿을수 없는 중국산만 팔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제 급히 면마스크를 주문했다.


한국에서도 마스크 수급이 원활치 않아서

외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려면 8장 이하여야만 하고

그것도 가족관계증명서등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도 자신의 직계만 되니, 자식과 손자를 포함해도 16장.

뭐, 이런 공식이다 치면 며느리는 그냥 죽으라는 건가 뭔가,

문득 회의가 들었다가도

어차피 연로하신 분들에게 저런 심부름 부탁을 하기도 그렇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싶으니 그냥 무감각해졌다.

그러다가 그냥…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한국에서 면마스크를 몇 장 주문했다.

그렇게 우체국 배송대행으로 주문하고 나니

미국에서도 교체필터를 파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걸 사야겠다 싶어 남편을 불렀는데

이 남자의 대꾸가 가관이다.


-그런 거 사지 마.

우리는 이미 걸렸어. 확실해. 

우리가 코로나 걸릴까봐 마스크 쓰는 줄 알아?

얻어 맞을까봐 쓰는 거야!


처음에 저 얘기 들었을 땐 너무 웃기더니

나중에는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 같아 씁쓸해졌다.

미국에서 동양인들이 받는 여러가지 험한 눈길들,

그리고 수상한 분위기들이 우리를 얼마나 쫄게 하는지.

지금은 그나마 마스크를 권장하는 분위기라 괜찮지만

며칠전만 해도 

동양인이 마스크를 쓰면 썼다고 구타하고

안쓰면 안썼다고 구타하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한숨 나오는 순간이 많았다.

우리집에 있는 일회용 마스크는 N95인데,

커피 로스팅 할때 연기와 먼지를 많이 마셔서 

약 반년전에 사두었던 것이다.

딱 봐도 너무나 전문가 같고 무슨 방역업자 포스가 풍기는 마스큰데

이걸 쓰고 나가는 것도 사실 이 시국에 부담스럽긴 하다.

마스크가 없어서 의료진도 애를 먹고 있는 이 시점에

이 상황을 만든 것처럼 보이는 동양인이(당췌 이게 뭔...) 

저런 걸 쓰고 오면 괜히 시비 거리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2월 중순과 3월 초에 감기를 앓았는데

이게 얼마나 심하고 요상한 감기였는지

숨이 막혀 잠을 잘 수 없었고(그래서 기침을 함)

가슴 쪽이 싸한 느낌과 약간의 열을 동반했었다.

우리는 이것을 코로나19 일거라고 잠정 결론지었다.

한번으로 끝난 것도 아니고 약 3주 후에 또 걸렸는데

이렇듯 재감염될 수 있다는 내용까지 추가하면

더더욱 그럴싸한 가설이지 않은가.

여튼… 남편이 하는 말은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걸렸고, 앞으로 걸려도 상관없으나,

우리를 미워하는 인간들이 벼르고 있으므로 마스크를 쓰자,

그것도 적당히 후져보이는(?) 면마스크를.


(너무나 고급인 우리집 마스크)


그럼 휴지는 어쩔 것인가.

어제 다녀왔던 동네 작은 마트에서도 볼 수 없던 휴지를.

뭐, 급하면 물로 씻으면 되겠지만

그것도 사실 간단한 일은 아니므로,

이제라도 아주 조금씩 써야 하지 않을까,

큰 일 볼때만 휴지를 써야 하지 않을까,

작은 일엔 쓰지 말고,  

차라리 속옷을 자주 갈아 입는 게…

이런저런 걱정을 늘어놓으니 이 남자가 하는 말.


- 내가 어떻게든 구해 올테니까,

팍팍 써! 

사람이 말야, 

자신 있게 살어! 


내가 이 남자 때문에 웃는다.

무슨 계획으로 휴지를 구해올런지는 모르겠지만,

휴지 많이 쓰면서 자신있게(?) 살라는 저 말이 너무 후련해서

한참을 낄낄댔다.

언제 이 사태가 끝날지 모르겠고,

그로 인해 여러 모로 우울한 상황이지만

가끔씩 웃음포인트를 날리는 남편 덕분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해본다.

그렇게 계속 낄낄대며 곱씹는 나를 보며

자신감이 충전된 남편이 또 한마디 던진다.


- 너, 나를 무척 좋아하는 구나? 


음… 할많하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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