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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희.노.애.락.

가계부를 쓰면서

by 글쓰는 백곰 2021. 1. 4.

내가 가계부를 쓴다고 하면

다들 의외라고 놀란다.

누군가는 머리 아프게 그런 걸 왜 쓰냐고

어차피 나가는 돈은 뻔하고

사치를 하는 편도 아닌데 굳이 왜 쓰냐고 했다.

글쎄… 이건 결혼과 동시에 생긴 습관 같은 거라서

내겐 그다지 부담스럽지도,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또한 내 원래 직업이 그거였고 (경영관리),

서류상의 잔고와 실재 잔고가 맞아 떨어질 때의 쾌감이란...

15년동안 경리로 일한 직업병 같은 건가?


누가 믿어줄까마는… 나도 나름 계획 있는 여자다.

한 해에 어떤 돈이 나가는가를 

작년에 기준해 예산을 짠다.

물론 예산보다 적게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인생이란 변수가, 소비를 조장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

2020년엔 예산보다 5,000불 가량을 더 지출했다.

저 정도면 선방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뭘 그렇게 많이 썼는가 다시 체크해 보았다.


우선… 예산보다 적게 쓴 종목은

차량유지비와 교육비, 피복비 였다.

뭐, 집에서만 있다보니 당연히 차량유지비가 줄었고,

코로나로 여름캠프등 체험체험을 할 수 없어 돈이 굳었고,

집에서 맨날 입는 옷만 입다보니 옷도 사지 않았다.

밖에 나가지 않으면 저 항목들은 당연히 줄게 되나보다.


예산보다 많이 쓴 종목은

비품, 소모품, 식대, 문화비였다.

밖에서 돈을 쓸수 없으니 집에 돈을 쓰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서랍이 무너져 내리는 30년된 냉장고를 바꿨으며,

가죽이 흉하게 찢어진 소파도 새로 바꿨다.

블랙프라이데이에는 로봇청소기란 신문물을 들이기도 했다.

(그것은 ‘청돌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게다가 역병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불안한 나머지

나의 쟁김병(?)이 도드라지게 되면서

휴지, 세제, 저장식품 등을 쌓아 놓게 되었다.

식대는 집에서만 밥을 먹으니 당연히 늘게 되었고,

문화비는 집에서 즐길 오락거리 비용, 즉

넷플릭스 구독, 닌텐도 스위치 게임, 도서 등등….

집에서 웅크리는 비용이 이렇게나 많이 늘었다.

그 와중에 집 보일러가 고장난 건… 뭐 새롭지도 않다.


2020년엔 참 지루하고도 힘든 한 해였다고

가계부가 알려 주고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름대로 우울해지지 않으려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재밌는 게임이나 책들을 사며 애쓴 흔적이 가득했다.

올해 예산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여름쯤이면 그래도 좀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

하반기부터는 낙관적으로 예산을 짰다.

올해엔 인플레이션이 닥칠거라고 그러던데,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살던대로 절약하며 지내기로 한다.

 

하루하루의 기록이 쌓여서 일년이 어떠했는가를 보고 있으면

그래도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그래프를 볼수 있어서

퍽 안심이 된다.

결혼할 때만 해도 전세자금 대출을 얻어서

어렵게 시작한 살림이었는데,

어느새 이만큼 이루고 살고 있구나 싶어 

남편과 나의 지난 세월이 새삼 대견해진다.

아픈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느라 병원비도 많이 들었고,

그 와중에 애도 낳았고, 이렇게 미국 이민도 왔고...

재정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나 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언제 무슨 변수가 생겨서 목돈이 나가게 될지,

언제나 불안했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했다.

그런 데이터가 하나둘씩 쌓여간 것이 나의 가계부다.

그것들을 찬찬히 훑어가면서 미래를 계획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가계부를 단지 수고스러운 과정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려웠던 살림이 조금씩 플러스가 되어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주부로서 자긍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다.

돈을 직접적으로 벌진 않지만, 

그래도 스스로 기여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에.

물론 마이너스가 된다고 해도 나쁘지만은 않다.

다 그만의 이유가 있었고, 그만의 교훈이 생겼을테니.


올해 가계부의 목표는...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의료비 지출이 초과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또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런 가계부의 2021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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