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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그사람

점쟁이

by 글쓰는 백곰 2015. 5. 4.

문득 예전 일들이 떠오른다.

21살, 나와 동갑인 사촌과 함께 점을 보러 갔었다.

사촌은 지금 사귀는 사람과의 결혼, 그리고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대답을 듣고 싶어했었다.

난 사실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결혼도 관심 없었고, 좋은 직업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사촌의 동행으로 호기심이 들어 쫓아가본 것이었다.

 

1998년. 복채가 2만원이었다.

점쟁이는 생년월일을 듣더니

사촌에게 제법 그럴싸한 말들을 쏟아냈다.

손을 쓰는 일을 해라, 지금 남자는 나쁘지 않다 등등.

그래서 살짝 기대가 되었다. 나의 미래는?

내 순서가 되자, 갑자기 점쟁이는 정색하며 말했다.

 

궁금할 게 뭐냐. 네가.

너 지금 되는게 하나도 없지?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노력해도 잘 안되지?

그런데 네 인생이 그래.

앞으로도 남의 도움 구하지 말고, 지금처럼 노력하고 살아.

다른 방법 없어. 네 인생은 그래. 그러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다시는 점보러 오지 마.

 

지금 생각해 보면, 저걸 점괘라고 풀어 놓은 건가,

돈 이만원을 당장 토해내지 못하냐고 화를 낼 법도 한데,

그냥 그자리에서 고개만 끄덕이고 왔다.

 

21살.

난 더럽게 운이 없고, 우울하고, 되는 게 없었다.

고등학교 때 열심히 했는데도 8번에 이은 취업실패와,

어쩔수 없이 부모님 회사에서 일을 해야 했고

대학에 합격했지만 일하라며 보내 주지 않았다.

그랬다.

나는 나름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낙이 없었다.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점쟁이 말이 맞았다. 난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

희망적인 말 한마디 뱉지 않아 내심 서운했었지만,

그게 현실이었고 내게 펼쳐질 미래였다.

 

그러다가 나는 서서히 내 인생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 같다.

25살. 아무도 보내주지 않는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방통대에 들어갔고, 미친 듯 공부해서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그 4년동안 일을 쉬어본 적도 없다. 낮엔 일, 밤엔 공부.

방통대가 결코 명문은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무엇보다 갚진 프라이드를 주었다.

졸업 후,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 어렵다는 방통대 공부를 4년 안에 끝냈고, 그것도 성적우수였다.

못할 게 없었다. 내가 하고자 하면 되는 거라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누가 기회를 주길 기다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때 즈음이었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운이라는 녀석이 제 멋대로 구는 게 인생이니까.

하지만 최소한 나는 내 일을 근사하게 해치웠다고 말을 할 순 있다.

운이 없는 게 내 탓은 아니잖아? 하며.

 

15년의 회사생활. 4번의 이직.

처음에는 멋모르고 휘둘렸지만, 마지막엔 내가 휘두르게 되었다.

빽도 없고, 연줄도 없는 내 인생에서

유일한 빽이 있다면 나의 성실함, 한결같음이었다.

내 인생은 그렇게 꽉 채워져있다.

점쟁이 말은 맞았다.

 

-열심히 살어.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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