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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희.노.애.락.

짧은 귀국 - 둘째 날

by 글쓰는 백곰 2020. 1. 22.

새벽에도 몇 번씩 깨어 시계를 보았다.

해야 할 일들이 많은 날이어서 그런지

긴장감에 몸이 수시로 깨어나려고 했다.

결국 7시쯤 일어나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남편이 그렇게나 신신당부 했던,

미국에는 없는 한국의 핫한 신상 간식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머물렀던 곳이 수원의 최고 환락가인 탓에

숙취음료들과 일회용 세면용품들만 눈에 띄었다.

결국 미처 챙겨오지 못한 빗 하나만 사들고 돌아왔다.


수원에 오면 하고 싶은 일이 꽤 있었다.

예전에 살았던 동네이다 보니

내가 익숙하게 아는 곳에서 해야 할 일들이 꽤 있었다.

머리도 하고 싶었고,

언제나 눈엣가시 같았던 얼굴의 사마귀도 없애고 싶었으며,

팬시점에서 신상 펜들을 쓸어담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고,

오전 10시가 넘어야 가게들이 오픈했기에 이 모든 걸 포기하고

어쩔수 없이 공식적 업무만 해결해야 했다.



호텔에서 나와 새마을 금고로 가는 길,

전에 살았던 동네를 구경도 할겸 캐리어를 끌고 걸었다.

아침 8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제법 쌀쌀했다.

차갑고도 건조한 한국의 겨울 냄새가 훅 느껴졌다.

환락가의 상점들을 지나면서

아직도 남아 있는 것들을 반가워도 하고,

사라져 버린 것들엔 잠시 의아해하기도 하며,

그렇게 시간이 주는 감상에 젖기도 했다.

유모차를 끌고 자주 다니던 빵집을 지나

한때 내가 장사하던 상가자리에 뭐가 들어왔나 간판을 찾아보기도 하고

언제나 위생이 별로라고 생각했던 재래시장을 걸으며

새삼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낯선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캐리어가 어찌나 잘 안끌리던지.

캐리어란 공항의 매끈한 바닥에서나 미끄러지는 것이지,

한국의 벽돌로 된 인도라던지 턱이 많은 횡단보도라던지

그런 일반 길에서는 끌 것이 못되는 구나 싶었다.

서서히 허리와 손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러다 병나는 건 아닌가 싶어졌다.


그렇게 새마을 금고에 도착,

나는 여권을 보여 주며 체크카드 재발급을 요구했다.

그러자 분실 후 6개월 이상 사용한 내용이 없다면서

체크카드를 발급하려면 최소 10건 이상의 거래 내역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니… 내가 한국에 4일 있는데, 어떻게 10건의 거래를 하라는건가...

신분증만 있으면 뭐든 가능할 거라 믿었던 것은 내 착오였다.

솔직히 나는 체크카드가 필요 없었다.

시부모님께서 내 통장계좌를 사용하시다가(용돈만 드리는 용도)

체크카드를 잃어 버리셨는데, 

한국에 온 김에 만들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기에 이러는 것일뿐.

결국 나는, 체크카드는 안되겠으니

그냥 통장 입출금만 가능하게 해야 겠다 싶었다.

후후… 과거의 나란 사람은 무척 센스가 있었구나.

통장을 만들 때 서명으로 만들었다니...

그렇게 나는 다시 캐리어를 끌고 도장집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우 도장을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길 건너에서 안경을 맞췄다.

조금만 집중하면 눈이 쉽게 피곤해졌기에

시력 검사를 받아야 해야 했다.

다행히도 노안은 아니라고 하지만,

한쪽 눈 시력이 난시가 되었다고 한다.

간 김에 남편 안경도 하나 더 주문하고

만들어지길 기다리는 동안 시부모님을 만났다.

두 분께 상황을 설명하고 통장을 드렸다.

두 분과 헤어지자 11시가 되었는데

점심을 같이 먹자 하셨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바로 서울로 가야했는데, 

과민성대장증후군을 가진 내가

언제고 길 한가운데에서 봉변을 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일분 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또한 두 분은 이미 3주전에 미국 우리집에 오셨고

두 분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입국했기 때문에...

음… 

여기서 지난 3주간의 고통은 생략하기로 한다.


안경을 찾고, 서울로 가는 좌석버스에 올랐다.

남편이 주었던 직불카드(교통카드겸)를 찍었는데,

사용할 수 없는 카드라고 친절하고도 매몰찬 안내멘트가 나왔다.

이렇듯 황당한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었다.

주머니를 탈탈 터니 현금 3900원이 나왔다.

그리고 차비가 3900원이었다.

나는 이런 극적인 상황이 너무너무 싫었다.

몸서리를 치며 좌석에 앉으려 뒤로 갔다.

평일 오전 시간이라 사람들이 없었다.

좌석버스였으므로 캐리어부터 안에 넣으려 했더니

캐리어가 너무 큰 나머지 들어가질 않았다.

통로에 세워놔야 하나, 어째야 하나 당황해하는데

운전사 아저씨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서 앉으라는)

나는 결국 앞좌석을 힘으로 제압하여(?)

겨우 끼워 넣었다.

그리고서 멍하니 있자니 내 앞에 신기한게 보였다.

좌석마다 설치되어 있는 USB 충전기였다.

우와, 우리 나라는 역시 첨단이야, 자랑스럽다가도

그런데 무슨 좌석을 이렇게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히 배치했어?

화가 치밀기도 했다.



오랜만에 타는 한국의 대중교통수단(치고는 비싸지만) 속에서

나는 미국 촌년 그 자체였다.

목적지를 지나칠까봐 불안한 나머지 계속 두리번 거렸다.

믿었던 남편의 직불카드가 나에게 신선한 배신을 안겨주었으므로

다음 행선지에서 만나기로 한 사촌동생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나는 또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야했다. (인출기 찾아 삼만리)

이런 쫄리는 상황, 나는 아주아주아주아주 싫어한다!!!

다행히도 그 복잡한 잠실 시내에서 사촌동생을 만났고

동생네 집에서 내 짐을 풀었다


짐에 값비싼 무언가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날 예정인 사람들을 위한 소소한 선물들

(초코렛, 아이들 옷)을 넣고 보니

실제로 내 짐은 별로 없었다.

제일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아버지의 다운자켓이었는데

사이즈가 2XL이다 보니 무겁지는 않으나 부피가 상당했다.

짐을 대충 풀고 친구를 만나러 신도림으로 향했다.


아… 신도림은 또 몇 년 만인가,

고등학교 소풍 때 마지막으로 헤맸었던 기억이 났다.

아수라장 환승역의 대명사 신도림역.

(환승이라 쓰고 환장이라 추억한다.)

다행히도 친구와 바로 만나 별로 헤매지는 않았다.


일을 다니는 친구가 반차를 낸 날이었다.

나 말고도 볼 일이 또 있었긴 했지만, 나 때문이라고 해두자.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만난 사이인데

같은 직업군을 가지고 있었고

비슷한 또래의 외동 아들이 있다.

아무래도 아줌마가 되어 만나고 보니 이야기의 주된 관심사는

각자의 아들들이 얼마나 기이하고 이상한 양상을 보이는가 였다.

그것이 외동이 가지고 있는 한계인지 심각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라며

서로가 서로를 다독이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렇게 2시간이 좀 지나자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언제나 건강이 최고라고,

다른거 다 필요 없고, 내가 내 건강 챙겨야 한다고,

서로에게 신신당부하며 헤어졌다.

쓰고 보니 무슨 손주라도 본 할머니들의 작별같다.


그리고 나서 사촌동생네 집으로 갔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동생은 부동산과 정치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몇시간 전에 만난 사촌동생과 이 동생은 서로 자매 지간인데

어쩜 두 사람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른 정치색을 가지고 있는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서로의 입장이라는 게 판이하구나,

나 그동안 참 고요한 삶 속에서 좁게좁게 살아왔구나 싶었다.

그래, 네 말도 그런 것 같다,

나라도 좀 그럴 것 같다,

애매하게 대답하며 정치에 대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한국에 있는 날만큼은 평화주의자로 남고 싶었다.


제부가 집에 와서 외식을 하러 나갔다.

메뉴를 고르라고는 하는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 때문에 두 자매, 제부 둘, 조카까지 한꺼번에 가는데

내 주장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만만하게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잠실의 어느 고깃집…

소고기를 조금 구워 먹다 보니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가게 메뉴판을 보았다

“소고기 : 미국산”

에… 얻어 먹는 주제에 뭐라고 할 순 없었지만

그 날 하루종일 굶다가 처음 먹은 끼니였다. 

뭔가 자괴감이 들었다.

결국 나는 천엽을 기름장에 찍어 먹기 시작했는데,

왜 소고기를 먹지 않냐는 제부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압도되어

어쩔 수 없이 미국산 소고기를 맛있다는 듯 먹어야 했다. 


사촌동생 집에 돌아와 

맥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훌쩍 자정이 넘어갔다.

피곤이 극에 달했지만 정신력으로 버텼다.

다음 날 출근을 위해 한 부부가 집에 가고 나서야

나는 조카의 방을 배정 받아 누울 수 있었다.

그런데... 벙커 침대였다.

이 큰 몸이 올라가니 움직일 때마다 삐걱댔다.

결국 나는 베개를 들고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뭔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일들이 

아주 버라이어티하게 펼쳐진 굉장한 날이었다.

내일도 굉장한 날이기만 해봐라,

자면서 중얼거린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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