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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희.노.애.락.

짧은 귀국 - 넷째 날

by 글쓰는 백곰 2020. 2. 14.

잠을 잔 건지 어쩐건지 모르게 날이 밝았다.

출근을 해야 하는 친구는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고

남은 친구와 나는 호텔 체크 아웃을 하기 전에

이곳 저곳을 돌면서 개인적인 용무를 해결했다.

오래간만에 걷는 서울길이었다.

지독한 겨울공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걸어 다닐만 했다.

우체국에 가서 우편물을 부치고,

교보 문고에 가서 문구류를 사고 보니

어느덧 체크아웃 시간이 가까워졌다.

허겁지겁 짐을 챙겨 친정으로 향하려는데

친구가 보내주기 아쉬웠는지 데려다 줄테니 천천히 가라 했다.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묻길래

두꺼운 돈까스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용산쪽에 있는 아는 가게로 나를 데려갔다.

그렇게 점심을 만족스럽게 해결하고,

가까운 커피숍으로 옮겨 대화를 이어갔다.


친구의 슬프고도 아픈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 이야기들을 계속 듣고 있자니

문득 ‘친구'라는 것의 경계, 

그 정의가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맞아 일부러 시간 내어 만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어떤 순간에도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하는 것이

보편적인 친구의 기준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17살에 만났지만, 

내가 아는 기억이라곤 17살 이후의 단편적인 것일뿐,

그 전의 삶이 어떠했고,

어떤 상처와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지

깊게 이야기해 보진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현재와 미래도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으면서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언젠가, 그 친구는 때때로 내 블로그에 와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내가 아주 힘들어 했었던 경험들에 대해,

그때는 그걸 알지 못했다며 미안하다 했었다.

그거야 내가 말을 하지 않으니 당연한거지,

또한 그 힘든 시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 상관없다며 넘겼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친구의 어린시절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그 삶을 관통하는 어떤 슬픔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다만 가만히 듣고 있는 것만이 최선인,

나란 존재의 무기력함도 절실히 느낀 순간이었다.

과거의 순간은 지나갔지만

현재의 고통과 절단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또 한번 미안해 졌다.

좀 더 너의 삶에 대해 궁금해 했어야 했다고.

나는 결코 네게 성실한 친구가 아니었다고,

몇번이고 사과하고 싶어졌다.


어느덧 해가 지려 했고,

하늘이 감상적으로 물들어 버리는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는 헤어졌다.

그래도 이틀동안 친구를 보면서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 내는 것이

어떤 식으로도 마음의 해소가 되기를 바랬었다.

그렇게 헤어지려는 순간, 

친구는 또 다시 눈물을 훔쳤다.

- 나는 어떻게 해, 너 이렇게 가면 나는 또…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애써 웃어보였다.

나도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친구를 계속 붙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보내야 했다.

언제 다시 오겠다고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우리, 

그 각자가 너무나 처연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친구의 차를 바라보며 병원에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곳은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이었다.

할머니께서 이곳에 계신지도 벌써 5년이 되어간다.

자꾸만 기력이 떨어지셔서 혼절하시는 경우가 많아

요양병원에 오시게 되었는데 그게 벌써 이렇게 오래되었다.

연락도 하지 않고 왔기에, 할머니는 화들짝 놀라셨다.

반가워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 보았다.

살이 다 빠져 앙상한 볼이,

음식을 씹을 때마다 볼록해지곤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서글퍼졌다.

할머니께서 계신 이 요양병원에

10년 전 우리 엄마도 똑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기에.

겹쳐지는 두 모습을 씁쓸히 받아 들이며

이제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감상에 젖어있거나 말거나

할머니는 여전하셨다.

여전히 불평불만이 많으시고, 요구사항이 많으셨다.

그게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면 우스운 이야기일까.

그렇게 몇 분을 앉아 있었더니,

친정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나를 데리러 오셨다.

요양병원과 친정집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다.

원래는 저녁 늦게 올 예정이었는데 (대중교통을 타고)

친구가 일부러 차로 데려다 주는 바람에 일찍 도착하고 말았다.

그래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저녁 먹고 온다던 딸내미가 갑자기 식사할 시간 즈음 왔으니

새어머니가 불편해  하실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버지께서 외식을 하자고 하셨고

우리는 장어집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아버지와 술을 같이 마셔본 게 언젠지 기억이 안난다.

같이 마신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술취한 아버지를 데리러 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그러다가 이제 운전면허 있는 새어머니 덕에

저녁 식사의 반주를 함께 할수 있게 되었다.

술이 술술 넘어갔다.

참 오래간만의 소주였는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넘어갔다.

딸의 주량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아버지는 신기하듯 보셨고,

어머니 역시 그러하신 듯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요즘 한국경기는 어떠한지,

은퇴계획은 어떠신지…

아버지는 그에 맞는 대답을 이어가시다가

마지막에는 본인 걱정은 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행복하니까 걱정 안해도 된다고.

그래요. 그러면 된거예요.

안심이 되기도 했다가, 뭔가 서운하기도 했다가,

갑자기 친구의 우는 얼굴이 생각나 울컥이기도 했다가,

그렇게 울긋불긋 술에 취했던 것 같다.


그리고 친정집에 와 간단히 옷을 갈아 입고 잠이 들었다.

정확히 밤 9시였다. 

그동안의 피로감이 술로 인해 무장해제 된 모양이었다.

자면서 한번도 깨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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