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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희.노.애.락.

말을 해주지 그랬어

by 글쓰는 백곰 2023. 9. 7.

이번 여름에 한국에 다녀왔다.

약 20일동안 머물면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 가족이 다함께 한국에 간 건 6년만이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만 해도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실감이 나지 않았고, 

떠난다는 것에 별 느낌이 없었다.

게다가 시대가 시대인만큼

꼭 만나는 게 아니어도 서로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으니까

떨어져 있어도, 직접 보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녀 오면서

사람들에겐 서로 얼굴을 봐야만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 살고 있으니 좀 편했다.

의무적인 그런 관계들로부터 거리감이 생기니

그 크기만큼 나의 부담감들도 사그러든듯 했다.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관계에 대해 대체적으로 만족했다.

그 편안함 때문에 

내 감정이 상한 채로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가족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동안 오해하고 있던 것들,

혹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었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아빠는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만

정작 자신의 가정에는 무심한 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예외는 있어서,

오빠에게 있어서는 무한한 애정과 재화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점차 커가면서 내가 받을 수 있는 애정의 양이란

오빠에게 감히 덤벼볼 수도 없이 하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나는 19살 이후로 손을 벌리지 않았고 

혼자 서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 비해 오빠는 현재까지도 아빠의 도움을 받고 있다.

쉽지 않았던, 지나온 세월 속에서 

가끔씩 나의 처지와 오빠의 처지가 비교될 때마다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도, 아빠는 별말이 없었다.

아쉬운 감정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고,

무언가 특별히 할말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한국에서 떠나올 때, 

아줌마(새어머니)는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잘 지내라면서 건낸 봉투에는 50만원이 들어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경제권을 아내에게 넘겨준 아빠는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너무나 속상했다고

나와 둘만 남은 자리에서 거칠게 화를 내셨다.

그러나 나는 떠나는 사람이니까,

아빠 곁에 남아있을 사람은 그분이니까,

나는 아빠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아줌마가 워낙 알뜰하신 분이니

그분에게 50만원이란  500만원 혹은 그 이상의 의미일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며,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게 6년 전의 일이었다.

 

이번에 한국에 간다고 하니 

아빠가 공항으로 마중을 온다고 하셨다.

나는 왠지 불편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을 거절했지만

한사코 오신다고 하시길래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가 머무는 숙소까지 데려다 주셨다.

지하주차장에서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올라 가려는데

아빠가 나를 따로 불러냈다.

그리고 봉투를 하나 주셨다.

새어머니는 모르게 하라며. 

100만원이 담긴 봉투였다.

아빠가 돈이 어디있었냐며 놀라는 나에게

노령 연금 나오는 걸 모았다며 아빠는 멋쩍은 듯 말했다.

떨어져 있던 세월 동안

아빠는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멀리 떠나는 딸에게 돈을 조금 밖에 주지 못한 것이.

그래서 아줌마의 눈을 피해 몇개월을 모았을 돈.

만원과 오만원권이 엉켜 있는 돈봉투를 보면서

나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아빠가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그 마음을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로 친정가족 모임을 두 번 정도 참석했다.

한국에서는 운전하기가 겁이 나서 택시를 타고 이동했는데

오빠가 숙소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다.

이마저도 사실 처음엔 거절했었다.

서먹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베푸는 호의가 껄끄러워서.

오빠는 내가 한국을 떠나오기 전 나에게 소리를 쳤었다.

내가 해외를 가게 되니 엄마 납골당을 정리하자는 의견을 냈는데

(내가 관리비를 혼자 담당하고 있었다)

네깟게 뭐라고 그런 말을 하냐고, 자신이 장남이라면서

얼마나 매섭게 화를 내던지, 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결국 해외에서도 계속 납골당 관리를 해야했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나는 납골당엔 가지 않았다.

그 곳에 가면 내가 그저 엄마 잃은 사람이란 걸

너무 처절하게 깨달을 뿐이었으니까.

그 음산한 곳에 엄마가 홀로 있는 것도 싫었다.

나는 예전에도 그곳에 다녀오면 

우울감에 사로잡혀 며칠동안 울곤 했었다.

나에게 납골당은 그런 장소였다.

그런데 그날, 차로 우리가족을 데려다주면서 오빠가 말했다.

자신은 아직도 납골당에 주기적으로 가고 있다고.

그리고나서 생각해 봤는데, 그때 화를 낸 건 잘못이었다고.

그때만 해도 자신은 결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고

당연히 자녀도 생길거라 믿었기 때문에

새로 생길 가족에게 엄마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그러나 이제 결혼은 이미 물건너 간것 같고(아직 미혼이다)

그때 너한테 서운하게 말한거 같아서 미안하다고 했다.

 

오빠가 그런 사과를 할 줄 안다는 게 놀라웠다.

게다가 그런 계획이 있는 줄도 몰랐었고.

말을 하지 않으면 내가 그 속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그 말을 들음으로써

내 마음 한켠에 쌓여있던 응어리가 조금 해소된 느낌이 들었다.

이해 못할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6년이 지나도록 내 앙금을 해소해 주지 않은게 

다소 괘씸한 기분이 들어서

다만 ‘그랬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서 애틋해진건지,

서로 생각할 만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던 것인지

뭐가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떠나오기 전의 나와

떠나온 내가 느끼는 가족의 느낌이

조금은 따뜻하게 환기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각자의 삶 자체가 쉽지 않았던 거겠지,

그런데 그걸 드러내기엔 망설여졌던 걸거야.

그래도 뒤늦게라도 진심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놀란 건 사실이다.

이렇게 가족에게 훈훈한 감정을 갖게 되나 싶었는데

며칠 안가 두 사람은 똑같이 나에게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다.

여전하다는 한숨이 나오게 했다.

나에 대해 180도 달라졌다고는 생각 안한다.

다만 6년치를 농축해서 건넨 진심이었다고 생각할 뿐.

그래,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게 정설이야.

그래도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전할 말이 있다면, 좀 하면서 살자.

진작 좀 말 해주지 그랬는가.

내 속이 얼마나 까매졌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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