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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희.노.애.락.

다림질을 하면서.

by 글쓰는 백곰 2015. 4. 13.

남편은 사무직 회사원이다.

회사에서 딱히 복장규제를 하는 것 같진 않지만, 최소한의 예의로 상의는 셔츠로 차려입는다.

전업주부라는 시시한 타이틀을 유지하는 나로써는,

그 셔츠를 다려놓는 것이 온전히 남편을 위한 배려이자 봉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열심히 다림질을 한다.

원래 교복부터 다려입었던 나이기에 그다지 형편없는 실력은 아니다.

대충 측정해보니 셔츠하나 다리는데 7분 정도 소요된다.

흐늘흐늘 쭈글하던 셔츠가 다림질 완성으로 빳빳한 각을 유지하게 되면

전업주부 백곰은 묘한 쾌감을 느낀다.

사실 그렇잖은가. 해도 해도 티가 안나는게 살림이라는 것인데.

특히 아이가 있는 집의 청소라는 것은... 그 지속성의 짧음에 분노를 느끼게 되지 않나.

그러나 다림질은 다르다.

저기, 나의 공이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옷에 큰 욕심이 없는 우리 부부는,

유행이나 트랜드에 따라가는 패션으로 옷을 구입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집 옷의 종류는 두가지이다.

늘어날대로 늘어나서 런닝이 삐죽이 보이는, 집에서만 착용가능한 웃인가.

아니면 대외적으로 입고 나가도 손가락질 당하지 않을만큼 준수한 옷인가.

그 준수한 옷이라는 것도 뭐, 메이커를 선호하는 것도 아니고, 깔끔하고 무난한 그런 스타일.

많이도 사지 않고, 가끔 큰 세일이 있거나 상대적 박탈감 같은것이 느껴지면

메이커 자켓 정도는 산다. 약 5년에 한번 정도.ㅋ

 

남편의 출퇴근용 셔츠가 갈수록 해지더니, 소매와 목 부분이 날캉날캉 올이 나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큰맘먹고 약 4장의 셔츠를 새로 샀다.

몸에 맞는지 입어본후, 빨래를 한후 첫번째 다림질에 착수했다.

아... 역시나 이녀석들이나, 나나 서로에게 길들여지려면 멀었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스타일대로 매번 다림질을 당한 기존의 셔츠들은

나의 손길 한두번만으로도 착착 각이 잡히고, 주름이 펴지지만

내 눈에 설익고, 내 손이 낯설어 하는 감촉의 이 새로운 셔츠들은

결코 내 지시대로 눕혀지지도, 펴지지도 않는다.

살살 달래가며 천천히 다리미를 밀어도

소매 뒷면엔 자잘한 주름들이 그대로 살아있다.

그럼 길다란 한숨을 토해내고, 다시 뒤집어 주름을 피고 나면

그 뒷면엔 더 깊고도 길다란 주름 하나가 선명히 자리하고 있다.

 

안다. 알아. 서로 낯선거.

게다가 독특한 질감이나, 드레시한 디자인은 더더욱 골치를 썩인다.

자신은 수월한 존재가 아니라는 듯.

다림질 러닝타임 7분은 어느새 15분을 초과하고

결국 몇개의 주름들을 남겨둔채 손을 들게 된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너나 나나 서로 길들일 시간이 필요하겠지.

까다로운 양반같으니.

 

사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비슷하다.

낯선 사람과 친한 사람과의 차이일수도 있고.

예민한 사람과 그냥 무던한 사람의 차이일수도 있고.

특히 감성이 예민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낯섦으로 인해 얼마나 피곤해지던가.

그러나 막상 그들이 나의 사람이 되어주었을때는 누구보다도 특별하고 정겨워진다는 것도 안다.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해보니 일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다.

 

 

뭔가 새로운걸 깨달았군! 하며 무릎을 치고 있던 찰나.

드디어 내가 셔츠를 상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깨닫는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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