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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희.노.애.락.

생일 축하해요

by 글쓰는 백곰 2018. 1. 23.

어제는 공식적인 내 생일이었다.

한번도 이 날에 생일을 챙긴적이 없었는데,

이제부터는 그러기로 했다.

내 주민등록증엔 크리스마스 이브가 생일로 신고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음력 생일을 신고한 것 뿐이지

사실 정확히 태어난 날은 1월 22일이다.

여태껏 음력으로 생일을 챙겨왔지만

사실 챙겼다는 말 자체도 무안할만큼

그냥 지나간 날들이 많았기에

그다지 애정이 가지 않는 나의 음력생일.


부모님은 내 생일을 까먹기 일쑤였다.

내가 일부러 며칠전부터 생일을 상기시키고

미역국이 먹고 싶다고 대놓고 광고를 해도

정작 그날 아침에 미역국을 먹은 적이 별로 없었다.

어릴 적엔 그게 무척이나 서운하더니

나중에는 이골이 나버렸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날 중 하나가 되어버렸고

그렇게 마음 단련을 하는 것이 스스로도 편했다.

실망감에 시무룩해지는 것도 하루이틀이면 족했다.


결혼을 하고 보니

시아버지 생신과 내 생일이 하루 차이였다.

내 생일 다음날이 시아버지 생신이었다.

결국 내 생일날 시아버지 생신상을 준비해야하는

그런 상황이 생겨버리자

그잖아도 하찮던 내 생일이 더더욱 멍청하게 느껴졌다.

하필 골라도 이런 날 태어날게 뭐람.


물론 그 와중에도 간간히 주변인들에게 축하를 받았고

남편의 선물과 축하도 빠지지 않았지만

과거의 그런 기억들은 두고두고 내 생일을 하찮게 만들었다.

스스로도 별로 중요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그런 느낌.

오빠를 낳고 나서 바로 내가 연년생으로 태어나자

엄마는 애가 빨리 들어서는 것이 지긋지긋해져서

바로 수술을 했다고 한다.

나는 집에서 태어났고,

돌잔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빠는 병원에서 태어났고,

손가락 주렁주렁 금반지를 낀 돌사진도 있다.

아빠는 내가 남자가 아닌 딸로 태어난 것을

집앞 창문에서 멀찍이 구경만 하다가

들어와 보지도 않고 바로 술을 마시러 갔다고 한다.

생일이 되면 왠지 마음이 좋질 않다.

그래서 인식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우울해지니까. 계속 마음이 가라앉으니까.


작년 12월 초였나,

미국 마트 안에 있는 Wells Fargo ATM 기계에서

현금을 인출할 일이 있었다.

카드를 넣자마자 익숙한 한글이 나왔다.

아마도 은행에서 그렇게 설정을 해 준 것이겠지,

신기한 마음으로 버튼을 눌렀다.

기계에서 돈을 세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안내가 나오더니

갑자기 생일케이크와 촛불 그림이 나왔다.

“***님, 생일 축하합니다. 한달 내내 행복하세요"

순간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12월 24일이 서류상의 생일이니 챙겨준 것이겠지만

낯선 땅, 이런 낯선 공간 속에서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은 그런 느낌.

고마워. 웰스파고씨.

씨익 웃으며 돌아섰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제 내 생일을 내가 진짜 태어난 날,

1월 22일에 챙기기로 결정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기도 그렇고,

시아버지 생신에 파묻혀 가기도 싫으니.

케이크를 사와 촛불을 붙이자

아이가 명랑하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세상의 모든 케이크 촛불끄기 대장.

이제서야 생일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하는 나이가 되어

엄마 생일이라며 박수치며 노래를 해주고,

자기가 촛불을 끈다.

그리고선 나에게 안기더니 다시 조그맣게 속삭여주었다.

“생일 축하해요, 엄마.”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제 아이가 커서 엄마 생일을 축하해준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내가 정말 원했던 생일 축하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옛날, 부모님에게서 받지 못한 축하를

지금, 내 자식에게서 받는구나

앞으로는 생일 날 우울할 일은 없겠구나.

그래서 어제는 뭉클하고, 기쁘기도 한 그런 날이었다.

자식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

내 생일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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