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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종이달 - 가쿠다 미쓰요

by 글쓰는 백곰 2018. 1. 29.

리카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최고의 행복이란

평범한 가정을 꾸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년이 지나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남편은 그녀에게 무심하기만 했다.

무료한 일상 속에서 부유하듯 떠있던 그녀는

열중할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일을 시작한다.

은행에서의 시간제 계약직이었지만,

상냥하고 친절한 그녀를 신뢰하는 고객들이 점차 많아졌다.

그렇게 작은 금액이나마 월급을 타고

그 돈으로 남편과 외식을 하던 날이었다.

그녀가 바라던 소박하고 로맨틱한 저녁은 없었다.

식사 하는 내내 남편은

그녀가 번 돈이 얼마나 하찮은지만 자꾸 일깨워줄 뿐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지를,

리카가 일을 하기 전에도 계속 강조해 왔던 사람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친절해보여도,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과는

더이상 관계가 좋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외면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리카의 주된 업무는 연로한 고객들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객들의 사소하고 시덥잖은 농담들을 다 참아줄만큼

유순하고 친절하게 응대했으며

그렇게 그녀의 평판은 나날이 좋아졌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리카는

자신의 업무분야를 더욱 공부하고, 은행에서도 인정받게 된다.


자신의 주고객인 어느 노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리카는 우연히 노인의 손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보다 한참이나 어린 그 남자, 고타는

그 날 이후 수줍게 리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리카는 고타에게서 젊은이가 갖는 특유의 공기,

허무맹랑하지만 뜨거운 삶의 열정 같은 것이 느껴져

왠지모르게 들뜨는 기분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리카는 업무시간 중 백화점에 들렀다가

고가의 화장품을 사게 된다.

계산하려고 보니 자신의 돈이 모자라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무 망설임 없이 고객의 돈에 손을 대고 만다.

다시 채워놓으면 되겠지,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자신을 좋아하는 고타를 만날 때마다

가난한 그의 형편을 고려해 자신이 더욱 돈을 쓰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비싼 음식을 사주고, 좋은 장소에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관계의 우위에 서게 된 리카는

고타의 빚을 갚으라며 거액을 내놓기도 했고,

그밖에도 그의 해외여행 경비, 차, 집등을 구해주었다.

물론 그녀는 그럴 능력이 없었기에 횡령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객들은 리카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돈쓰는데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자신의 주택대출금을 상환하기도 하고,

비싼 옷, 비싼 화장품 등 자신을 꾸미는데도 주저함이 없어졌다.

몇년의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고타는 어느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돈을 권력처럼 휘두르기 시작했고,

리카의 전화를 받지 않기도 했다.

고타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도

리카는 그를 포기할수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매달릴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리카와 고타가 그들의 아지트에서 만나기로 한날,

고타가 고개를 숙인채 울음을 터뜨린다.

자신은 한번도 도와달라고 한적이 없었다고.

자신을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리카는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에 감사가 시작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더이상 빠져나갈수가 없음을 직감한 리카는 해외로 도피를 하게 된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면 어쩌지, 걱정하면서

낯선 땅안에서 스스로 침잠해가던 하루하루.

그러다 더이상 숨을 곳이 없어졌음을 깨달은 그녀는

어느샌가 고타와 같은 말을 되뇌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줘.




줄거리는 저렇게 적었지만, 사실 더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주로 리카와 관련된 지인들,

즉 동창, 친구, 전애인등이

뉴스를 통해 리카의 횡령소식을 듣게 되면서

그녀가 왜 그랬을까 반문하며 자신의 상황을 돌아본다는 내용이다.

동창이었던 한 여자는 지독한 절약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의 딸이 슈퍼에서 도둑질을 했음을 알게 되고,

남편에게 돈에 휘둘리며 사는 것을 그만하라는 비난을 받는다.

저런식으로 애를 키웠다간 횡령이나 하게 되는 것이라며.

또 리카의 전애인이었던 한 남자는 아내의 과소비로 인해 이혼을 하게 되고,

뉴스 속의 리카를 떠올려 보며 자신의 현실과 먼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리카의 친구였던 한 여자는 과소비로 인해 이혼을 당하게 되고

양육권마저 빼앗겨 몇 달에 한번 딸을 만나는 날만을 고대하지만

딸이 자신을 지갑으로만 여길뿐,

친구도, 엄마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때 그녀는 리카를 떠올린다.


다양한 인간의 군상을 그려내면서 각자의 사정,

즉 낭비하거나 절약하는 이유,

무엇이 그들을 홀리고 있는지를 잘 표현한 수작이다.

줄거리만 보면 무슨 통속 소설 같은 상황이지만

(젊은 애인을 위해 돈 바치는 여자라니)

사람마다 각자의 삶이 지난 허무,

그것을 채우는 수단으로서의 돈의 역할을 조명한다.

자신의 약한 자아를 보충하는 방법으로써 돈을 사용하고,

그것이 주는 쾌감에 이성이 마비되어 몰락하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경각심을 가지게 되면서도,

안쓰럽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누구나 삶의 허무를, 인생의 고독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해서

다른 무언가에 중독되는 것이 모두 납득되어야 하는걸까.

특히 그것을 돈의 소비라는 것으로 해소한다는 것은

그만큼 좁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씁쓸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종이달’이란 한때 일본 사진관에서 가짜달을 만들어

사진을 찍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연인이나 가족들의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의미한다고 한다.

리카가 갖고 싶었던 그 종이달은,

그 가짜의 행복은 결국 그녀의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다.

쓸쓸한 인생.

그녀를 말리는 사람도, 눈치채는 사람도 없었다.

누가 제발 알아차려달라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속으로 삼켜지곤 했다.

마음으로만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 시대에...

그녀에게 한사람이라도, 브레이크를 밟게 하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몰락하지 않을수 있었을까.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은 좋은 소설이었다.